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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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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쪽에서 올라온 쿠로시오 해류가 나가사키만을 적신다. 옛 포구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불러들였을 이 해류. 아주 먼 옛날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문물이 이 해류를 타고 올라왔으리라. 근대에는 인도와 말레이 반도까지 진출한 유럽인들을 싣고 오는 데 일조한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나타나면서 일본이 서구화되자 동북아시아는 급류 속에 휘말린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이 항구는 지정학적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개항과 원자폭탄 투하. 결정적인 그 두 사건은 각각 일본의 서구화에 이은 군국주의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종식을 가져온다. 그 사건들은 결국 우리에게 각각 일본 제국주의로 인한 우리의 희생, 훗날 우리의 해방을 부른다.

서구와의 교역은 이 지역에 많은 부를 가져다준다. 거기에 우리 조상들이 한몫을 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큐슈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그 주역이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유럽으로 팔려나가는 주요 교역품이 되었고, 유럽의 앞선 과학기술문명이 이 항구를 통해 들어와 일본의 근대화를 도왔음은 당연하다.

이 도시는 그 역사만큼 유럽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16세기에 유럽의 무기들이 그들의 종교와 함께 이곳을 통해 들어온다. 이 도시가 조선업과 무기 공장을 앞세운 중공업 도시가 된 것은 전적으로 유럽 열강을 본받은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러한 군수기지화는 원자폭탄을 불러들이는 직접적인 동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비극은 이 도시 곳곳에 원폭 관련 유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원폭투하 중심지’와 ‘원폭 자료관’ ‘원폭 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 ‘평화공원’ 등등, 이들 기념물들은 한결같이 원자폭탄으로 그들이 겪은 참상을 고발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나아가 핵무기 없는 세계 평화를 이루자고 호소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동의와 동참을 이끌어내고 있다.

전시실의 끔찍한 유물들. 폭발 당시 발생한 열에 녹아내린 사람 뼈, 유리창과 시멘트 바닥이 한 덩어리 바위로 굳어버린 모습. 나가사키 시민들의 고통을 기억하려는 노력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의 후손들이 다시는 핵전쟁 없는 세계에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절규는 자명한 외침이자, 나가사키 시민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새겨야 할 영원한 사명이다.

그런데 지옥에서 건져 올린 그들의 처절한 호소지만, 그것에서 어떤 진정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이 주창하는 평화의 호소의 이면, 측면, 전면 그 어디에도 전쟁은 왜 일어났으며, 원자폭탄은 왜 거기 떨어졌는가에 대한 한마디 설명과 반성의 글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우리가 지옥을 경험했으니, 다시는 그런 지옥을 이 땅에 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모토만이 선명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 옆 언덕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영구한 세계평화를 기원하고, 인류 최고의 희망을 상징하는’ 평화기념상이 공원의 중심부에서 나가사키를 내려다보고 있다. 건장한 이 남성상, 하늘로 쳐든 오른팔은 떨어지는 원폭을 가리키고, 수평으로 뻗은 왼팔은 지상의 평화를, 감은 눈과 굳게 다문 입의 얼굴은 전쟁 희생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람한 근육을 가진 서양인을 빼닮은 평화상에서 ‘반성’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로 희생된 이웃 국민들에 대한 일본인들 생각의 단초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평화기념상으로 세계 평화를 호소할 수 있을까.

글·전광호(부산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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