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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두려움,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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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뛰는 그 무게와 질감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의 두려움이 있다. 사람이 살면서 정말 어쩌다 겪는 격렬한 무서움, 일상적으로 시시때때 느끼는 겁과 달라서 해일에 휩쓸리듯 내가 그냥 통째로 먹힐 것만 같은 공포의 감정이다. 대개는 그 두려움에 굴복하거나 내몰려 자포자기 사고를 치고 폐인이 되지만, 이것을 연료 삼아 감정의 반전으로 역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두 편은 그런 인물들을 그린다.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는 <명량>과 두려움이 증오로 바뀌는 <군도>가 그렇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큰 칼 옆에 차고’ 애끓는 고뇌를 느끼던 그분에 대해 우리가 더 알 것이 남아 있겠느냐는 예상과 달리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권한다. 장군은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틀어 이보다 더 멋질 수 없는 말씀을 남겼다.

“그러나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본인을 신(臣)이라고 일컫는 데서 느껴지는 예와 충직함, 겨우 한줌도 안 되게 남은 물자를 일일이 세어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는, ‘무려’ 열두 척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수백 척 앞에 겨우 그걸로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귀한 용기. 하지만 <명량>의 해석에 의하면 이 말은 “겨우 열두 척이지만 저라면 해 볼 만합니다”가 아니고, 겨우 열두 척밖에 없는 만큼 두려움도 크나 “그 두려움을 안고 신은 싸워내겠습니다”에 가까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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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두려움이란 자기 안에서 날뛰는 미친 괴물과 같아서 통제가 불가능하고 자기 자신을 갉아먹기 일쑤이며 결국 자신과 남을 다 파괴하는 눈멀고 무서운 힘이다. 그러나 결국 이 무서운 힘의 고삐를 쥐고 방향을 다시 정해 줄 수 있다면 이것은 놀라운 원동력도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그와 똑같은 크기의 용기로 전화(轉化)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가공할 힘이 어디 있을까. 염려하는 아들과 겸상을 하며 장군은 이런 생각을 정리해 간다.

여기에 장군은 또 한 가지를 더 주목했다. 두려움이란 바로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두렵다면 상대방 역시 나를 두려워하고 있으리라는 것. 이순신 장군은 결국 자기희생을 통한 최초의 작은 승리를 변화의 도화선으로 삼았다. 도망갈 기회만 노리는 부하들에, 막강 함대와 조총으로 이미 엄청난 힘을 갖췄는데 해적왕까지 더해져 그 총력을 확인하기조차 힘든 강력한 적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총합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에 그냥 맞서는 용기는 구국이나 충의 도리를 떠나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으려는 고귀한 싸움이었고 그래서 <명량>은 새로웠다.

<군도>에서 조윤(강동원)은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가문에서 잊혀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던 간절함이 증오로 전화된 경우다. 모든 구애에는 조금씩 다 안쓰러운 구석이 있지만 부모를 향한 어린 자식의 구애만큼 맘 아픈 것도 없을진대, 어린 조윤은 어떻게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튼튼히 해 보려고 어린애로서 짠한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엔 괴물로 변한다. “너는 결국 이 집안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거야, 네 아버지에게 너는 영원한 곁다리야”라는, 존재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커다란 두려움은 결국 역의 동력이 되어 아버지와 집안을, 그리고 고을을 해치고 파멸시키는 극단적 드라이브로 변한다. 우아한 도포자락으로 수묵화 같은 선을 긋는 조윤의 무예는 결국 그 뿌리가 두려움에 닿아 있던 것이다.

하지만 조윤은 스스로 나선 두려움의 여정을 결국 끝까지 탐험하고는 어린 조카를 얼떨결에 소중히 보호함에서 보듯 새로운 가치를 긍정하며 따뜻함을 회복해 떠난다. 지독한 악인이었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덮어버리거나 피하지 않고 맞선 조윤의 최후에서 적어도 자신에게는 정직했던 자의 비장한 기운이 느껴진다.

글·오은하(매스컴학 박사·<코리안 시네마 투데이> 필자)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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