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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신랑은 가시고기가 치어를 돌보듯이 아내와 가정을 따뜻하게 보살펴주시길 부탁….”

주례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다들 참고 있었던 듯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크게 소리 내어 웃은 적이 별로 없는 나조차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손으로 입을 막아봤지만, 한번 터진 웃음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자꾸 나왔다. 누가 봐도 신랑의 춤사위는 소위 ‘신의 한 수’였다. 예식이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두툼한 등허리 어딘가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는지, 신랑이 엉덩이를 흔들며 만세를 했다. 100kg이 넘는 거대한 덩치의 신랑이 벌인 장난기 가득한 행동으로 예식장엔 흥이 넘쳐났다.

새해가 막 시작되고 첫 혼사. 사촌 큰오빠의 아들이니까 조카의 결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였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다른 저들만의 문화와 가치관이 형성되면서부터는 가족 모임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조카 역시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직업이 무엇인지, 어떻게 변했는지, 심지어 나이조차도 금세 계산되지 않았다. 딱히 조카의 프로필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형제들과 사촌 형제들의 근황을 알고 싶었고, 그들과의 만남이 더 기대되었다. 누구의 결혼이 되었든, 청첩장을 받아 식장에 가고 신랑 신부의 입장을 지켜보면서 괜히 코끝, 눈끝이 찡해지는 내 오래된 신파적 현상은 밀어두고서 말이다.

“언니, 신랑 신부 나이 차가 좀 있나요?”

조심스레 올케에게 물었다.

“띠동갑이에요. 같은 범띠. 둘이 좋다니까 허락했어요.”

더 묻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신부의 얼굴이 서른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카의 모습이 마흔넷일 수는 없었다. 행여 모습은 그렇다 쳐도 숫자는 더욱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조카는 젖먹이였으니 나와는 열 몇 살 차이였다.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준다 해도 서른둘은 도저히 될 수 없는 외모였다. 미추(美醜)의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진한 색조 화장이 파고든 입가의 주름과 적당히 늘어진 팔뚝 살은 누가 봐도 40대였다. 그러니까 신부가 신랑보다 열두 살이 많은 거였다.

조카는 어릴 때부터 생각이 깊고 행동이 진중해 대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부의 나이를 알고 나니 조카가 더더욱 어른스러웠다. 야무진 인상을 가진 신부와 둥글둥글 귀염성 가득한 신랑이었다. 혼인서약 다짐을 할 때 신부의 카랑카랑한 대답에 하객들의 흥은 더욱 돋웠다. 막 시작된 새해에 범상치 않은 가치관을 지닌 신랑 신부를 대한 내 가슴엔 오래된 신파적 눈물 대신 꽃물 같은 웃음이 번졌다. 20년 전 나는, 결혼식이라는 단 하루를 위해 눈물 나는 다이어트를 감행했고, 친구에게 놀러 가듯 고가의 메이크업숍을 겁 없이 드나들었다. 그런 날이 있었나 싶게 몸과 얼굴이 예전으로 원상 복귀되는 데 걸린 시간은 석 달이면 충분했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스타일은 달라졌지만, 신랑 신부의 모습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포장되었다. 점잖고 단정한 신랑들로, 수줍고 단아한 신부들로 다듬어졌다. 고정된 틀과 일정한 온도에 의해 오차 없는 모양을 유지하며 찍혀 나오는 호두과자처럼 모두 비슷했다. 하객들을 웃음보 터지게 한 이날의 신랑 신부는 보편적인 신랑 신부의 모습을 벗어나 개성 넘치는, 세상에 하나뿐인 커플이었다.

주례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어졌다.
 
“에, 씩씩한 신부를 보니까 당부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노파심에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부디 가시고기가 치어를 보살피듯이….”

하객들의 박장대소에 주례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많이 참았던 듯, 오래 기다렸다는 듯, 신랑은 신부를 번쩍 안아 올렸고 신부는 당당하게 신랑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둘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첫출발이다. 응원과 웃음을 담은 박수 소리가 식장에 울려 퍼졌다.

 


김순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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