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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어린 시절부터 꿈이 있었다. 이문세의 ‘별밤’을 듣고, 정은임의 ‘영화음악’과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던 그 시절의 내 꿈은 심야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가 되는 것. 꿈을 꾼 지 20년이 훌쩍 넘은 올해, 나는 새벽 2시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가 됐다.
 
첫 게스트는 배철수. 한 시절의 내 영웅을 ‘선배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된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진행자석과 게스트석이 뒤바뀐 것 같은 느낌이랄까. 떨리는 데 떨리지 않는 척하느라 정말 떨렸다, 라는 문장이 이처럼 적확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컨트롤 부스에 앉아 있던 피디가 말하길, 내 손이 계속 ‘덜덜’ 떨렸다고.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나 ‘인사이드 아웃’을 만든 픽사에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스물두 가지 규칙이 있다. 그중 제1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원칙인데 소개하면 이렇다.

“캐릭터의 성공보다는 캐릭터가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을 중요시 하라!”

픽사의 스토리텔링 규칙은 내가 반복해서 보는 원칙이다. 길을 잃거나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 나는 이들의 원칙을 읽었다. 내게 이 스물두 가지 규칙을 준 건 5년 전 모 방송의 드라마 피디. 당시 나는 드라마 대본을 3회까지 써놓고 완전히 헤매는 중이었다. 결과에 대해 묻지 마시라. 5년 전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면 나는 대단한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16부작 드라마의 작가가 됐을 테니까.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중요한 건 “인간은 구체적인 실패에서 가장 많이 배운다!”라는 사실이 내겐 보다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내 평생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직업을 거쳤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인터넷 서점 에디터, 패션지 기자, 작가(소설, 웹소설, 칼럼, 인터뷰, 드라마, 라디오 대본 등등). 모두 ‘글을 쓰는 일’이긴 했지만 때에 따라 ‘팀 작업’이 돼야 하는 경험을 한 셈이다. 결국 일에 관해선 일생 편하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기심은 자주 익숙함을 이겼고, 덕분에 나는 ‘성공’보다 많은 ‘실패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내가 얼마나 자주, 많이, 망했는지 쓰다 보면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다. 아주 가끔의 성공과 잦은 실패가 내 일상이었다.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 아닐까?”
 
이 마법 같은 말에 직업이 대여섯 번도 더 바뀌었으니 말을 말자. 그것도 나처럼 겁 많은 사람이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용기’가 단단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용기란 무모함과 달라서 엄청난 주저함과 두려움 속에서 끝내 기어 나오는 힘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새로운 제안을 받으면 내가 얼마나 큰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지는 ‘나만’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런 ‘짓’을 계속하는가. 체 게바라가 한 말에 비밀이 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살기 위해선 ‘리얼리스트’가 돼야 한다. 하지만 이 문장 뒤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진행자로 시작한 첫 라디오 방송이 끝났다. 떨려서 혼이 나갈 것 같았다. 27년간 라디오를 지켰던 배철수 선배님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아 여기 적는다.

“이제 한 식구 됐으니 언제 술이나 한잔 마십시다!”

 


백영옥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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