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점심시간 즈음이면 사무실 근처에 도착할 것 같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 을지로에서 40년 동안 인쇄소를 하다 은퇴하시고, 건강을 위해 3년 전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아버지가 한 시간 반이나 한강변을 달려 마포까지 찾아오신 거다.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라고 했지만 얼굴 본 지 한 달이 넘은 딸을 보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숨 가쁘게 밟으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항상 바쁘셨다. 하지만 어쩌다 쉬는 일요일이면 2남 2녀의 자식들을 깨워 산으로, 들로, 공원으로, 극장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어찌 보면 내가 어쭙잖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며 살 수 있게 된 것도 유년시절 아버지가 보여준 자연의 모습과 감성, 가족 사랑이 키워준 자신감 덕분일지도 모른다.
소규모 기획사와 출판사를 빠듯하게 운영하다 보니 요즘 들어 아버지가 더욱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그동안의 고단함과 힘듦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려 40년 동안 종이먼지 날리는 인쇄소에서 하고 싶은 일, 쉬고 싶은 것 모두 포기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연년생 자식들 등록금 내는 날과 직원들 급여 날이면 돈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룬 날도 많았을 것이고, 때로는 고단함에 주저앉고 싶은 날도 있었으리라. 누구에게 쉽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평생 져 나른 종이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가족을 지고 사신 아버지도 어느덧 칠십대 후반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평생을 절약하며 검소하게 사신 덕에 자식들에게 경제적으로 기대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요즘 주변에서 부모님 봉양이나 병간호, 요양 병원비 문제 등으로 형제간에 불화가 생기고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며칠 전 아는 언니도 전화를 걸어와 중풍으로 쓰러진 친정아버지 모시는 일로 2남 1녀 자식들이 한바탕 다투었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지난해 '의리'가 회자된 적이 있다. 의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를 뜻한다. 나 역시 지금껏 친구들이나 거래업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리를 최우선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정작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에게 '의리'를 지켜왔는지 스스로 반문해본다. 부모님도 언젠가는 편찮게 되실 테고 집이나 병원에 모시게 됐을 때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셨듯이 나도 변치 않는 의리를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부모님들은 힘들고 궁핍한 시대를 살면서 노후를 준비해놓을 겨를 없이 자식들에게 의리를 지키려 무던히도 고생하셨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힘도 없고 가난하다. 이젠 자식들이 부모님들에게 '의리'를 지켜야 할 때다. 형제자매 간에도 마찬가지다. 좀 더 배려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의리를 지킨다면 부모님 모시는 문제, 재산 문제로 가족끼리 서로 얼굴 붉히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의리. 고령화 시대에 가족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글 · 김혜라 (상상미디어·로즈앤북스 대표)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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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