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서른이 되던 늦여름, 나는 해남 대흥사에 있었다. 나무 우거진 경내로 걸어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곰밤부리 꽃이었다. 곰밤부리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자그마한 하얀 꽃이 어둔 숲 그늘 사이로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히 피어 있기에 내 시선도 무심히 머물렀을 뿐이다. 자세히 보니 곰밤부리였다. 그 지긋지긋한 잡초가 저토록 소담한 꽃을 피우다니.
대학시절 어떤 별장에 공짜로 사는 대신 300평 가까운 잔디밭을 돌봐준 적이 있었다. 생전 살아본 적 없고 아마 앞으로도 살기 어려울 근사한 별장에 잠깐이나마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나는 잔디밭을 돌봐야 한다는 조건에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것이 2년에 걸친 비극의 시작이었다. 산골 태생인 나는 어린 시절 수만 평의 뒷산을 뒷마당 삼아 놀았다. 300평쯤이야 하는 배짱은 거기서 비롯되었는데, 뛰어놀던 수만 평과 내가 돌봐야 할 300평은 평수로 비교할 수 없는 크기라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머리 수건을 뒤집어쓴 채 잔디밭의 끝에 쭈그려 앉아 반대쪽 끝을 바라보면 한숨부터 나왔다. 언제 저기까지 가나. 머리 위로 높이 솟구친 태양은 무자비하게 뜨겁고, 땅에서는 후끈후끈 숨막히는 지열이 올라오고, 땀냄새를 맡은 날파리떼는 코앞에서 맴돌았다. 300평 잔디밭의 잡초를 뽑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이제 됐구나 싶어 겨우 허리를 펴고 저쪽 끝을 바라보면 어느 새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우리집 마당, 아니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주인집 마당 구석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뽑아낸 온갖 잡초들이 시들시들 말라갔다. 쇠비름도 있고, 강아지풀도 있었지만 단연 압도적인 것은 곰밤부리였다. 무더기로 피어나는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어보였다. 어디서나 떨려나는 고작 잡초 주제에 어쩌자고 생명력은 그토록 질긴 것인지…….
진저리를 치며 뽑아냈던 곰밤부리와 저 남녘의 산사에서 불쑥 마주쳤을 때, 처음 나는 그 녀석을 알아보지 못했다. 소박한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 서성거린 뒤에야 익숙한 모양새를 눈치 챘고, 시선을 끌었던 아름다움의 정체가 한낱 잡초였다는 사실에 잠깐 숙연해졌다.
올해 여든여덟인 내 어머니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인생을 자꾸만 안타까워하신다.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인생을 살다보니 어느 새 죽을 날이 가까웠다며, 사람 살았달 게 없단다. 그런 어머니를 쓸쓸히 지켜보다 문득 해남 대흥사에서 만난 곰밤부리 꽃이 떠올랐다.
세상천지 어디나 흐드러져 대접 못 받던 곰밤부리도 저 으슥한 산길에서 눈부신 꽃을 피워올리지 않았던가.
세상에 살았달 게 없는 인생은 없다. 어떤 인생이든 나름대로 고귀하고 눈부시다. 아무도 거기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문득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지겹도록 뽑아냈던 잡초가 그토록 어여쁜 꽃을 피우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돌이켜보면 내 어머니의 쓸쓸함은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 보잘것없지만 위대했던 어머니의 한 삶을 눈여겨봐주지 않은 못난 딸의 책임이다. 짬 내어 자꾸 돌아볼 일이다. 어느 구석, 어여쁜 꽃 한 송이 내 시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지.
글·정지아(소설가)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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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