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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순결한 원형들이 비롯되는 섬,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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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진도에 가본 지 15년이 되었다. 15년 전에 처음 가봤는데 그로부터 다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2001년 여름 진도행을 감행한 이유는 김훈의 책 <원형의 섬 진도> 때문이었다. “맑은 땅, 삶의 모든 국면들을 포괄하는 힘세고 순결한 원형들이 비롯되는 섬”이라는 구절을 읽자 진도가 내 마음에 동그랗게 떠올랐다. 아리랑의 한 버전을 생산한 땅, 씻김굿 등 신령스러운 기운이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땅 위에서 김훈이라는 글무당이 춤을 추고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당시 나는 잡지사 기자였는데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마침 잡지사로 진도에 관한 책이 배달되어 왔다. 어떤 여성 문인이 쓴 에세이집이었다. 그녀는 50대의 가정주부였는데 어느 날 이혼하고 진도의 한 산골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빈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진도로 향했다.

그의 집은 푸르디푸른 파밭이 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바다가 섬을 감싼 것인지, 파밭이 바다를 감싼 것인지 모를 외곽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어느 산중턱까지 구불구불 올라간 곳에 있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이었다. 그는 자신이 김훈과 친하다고 했다. 김훈이 <원형의 섬 진도>를 쓰기 위해 진도에 내려왔을 때 자신의 집을 찾아 묵고 가곤 했다고. 다른 사진작가와 함께 저녁 바다를 마주보고 산중턱의 집에서 마시는 술은 아무리 독한 고량주라도 서늘하게 넘어가지 않았을까. 김을 안주로 해서 간장에 찍어가며 마시다가 노을을 보면, 그 노을이 가슴을 향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김훈의 이야기를 그를 통해 전해 들으며 나는 진도에 와서 살아버릴까 생각도 했던 것이다.

<원형의 섬 진도>는 진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지닌 다큐멘터리 사진가 허용무와 <자전거 여행>을 다니던 김훈이 함께 작업한 책이다. 9년 동안 진도의 풍경과 사람들을 담아냈다는 사진가의 말이 그대로 믿겨질 만큼 이 책에 실린 사진에는 혼이 담겨 있다. 청년 시절부터 진도에서 탁배기를 들이켜며 뿌리 뽑힌 고향의 상처를 위로했다는 김훈의 탐미적인 문체 또한 예사롭지 않다. 1부 ‘자연’은 각 지역만이 지니는 고유의 산하와 생태를 보여준다. 진도의 들은 낮은 산과 산 사이에서 비옥하고 사람들의 마을에서 가깝다. 실핏줄처럼 작은 하천들이 발달해서 들의 구석구석을 적신다. 2부 ‘문화’는 진도의 유무형의 문화와 전통에 내재된 정신을 밝혀낸다. 진도에서 문화와 삶은 따로따로가 아니며, 노래는 삶과 일을 노래한다. 씻김굿과 다시래기가 그렇고, 강강술래와 진도아리랑과 들노래가 그렇다. 그래서 김훈은 진도가 갖는 문화적 원형들은 살아서 작동하는 원형들이라고 말한다. 이 원형들 속에서 사람들은 고착이 없는 생성과 위안을 얻고, 한없이 소통하며 괴로운 삶을, 고달픈 현실을 견뎌낸다. 3부 ‘역사’에서는 명량해전이 벌어진 진도 울돌목을 돌아보며 김훈이 어떤 마음으로 <칼의 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갔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 한 대목을 보자. “사지(死地)는 피아간에 공통된 사지일 뿐이다. 양쪽 지휘관이 이 바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바다의 물결 위에 올라타서, 바다의 거대한 힘에 편승한 쪽에게 승리의 기회는 컸다. 바다 위에서 적과 싸울 수는 있지만, 뒤척이는 바다 위에서 바다와 싸우는 싸움은 불가능했다. 이순신은 절망을 절망으로써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15년이 지난 진도는 얼마나 바뀌어 있을까. 책 속의 진도는 이렇듯 영원히 살아 있건만.

글·강성민(글항아리 대표)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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