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이지(李枝 ?~1427년)는 여말선초의 인물로 이성계의 사촌동생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성계의 집에서 성장하면서 줄곧 이성계의 곁을 지키게 된다. 그래서 이성계가 장수로서 공을 세울 때 이지는 항상 앞장서서 싸웠다. 황해도 해주에서 이성계가 왜구와 맞서 싸운 적이 있었다. 이때 이지가 선봉에 서서 수많은 왜구들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특히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할 때는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이틀 거리인 영풍의 이성계 사저를 하루 만에 달려가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이성계가 회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당연히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개국공신으로 책봉받았고 무장이면서 행정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조·호조·예조의 판서까지 두루 역임했다. 이재(吏才)가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지도 이성계 진영을 일망타진한 1차 왕자의 난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방원(후에 태종)은 이지의 사람됨이 온화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유배를 보냈다가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이지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중용했다. 사람 보는 데 일가견이 있던 태종은 그후 이지를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이지는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실록에는 매년 연말이 되면 죽은 부모를 위하여 절에 가서 부처를 공양하고 재(齋)를 올리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그의 최후는 전형적인 희비극이다. 세종 9년(1427년)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한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전후 사정이 특이하다.
이지는 어린 후처 김씨와 함께 절에 가서 머물렀다. 그런데 밤에 김씨가 그 절의 중과 간통을 하다가 이지에게 발각된 것이다. ‘이지가 간통하던 장소에서 김씨를 붙잡아 꾸짖고 구타하니 김씨가 이지의 불알을 끌어당겨 죽었다.’ 왕실 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민망한 최후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절에 따라간 사람들이 모두 김씨의 노비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현장에 있었던 한 노비가 충청도 절제사로 나가 있던 아들 이상흥이 부고를 듣고 왔을 때 은밀하게 그 사실을 전했다.
주변에서는 “서둘러 형조에 알려 시체를 검시하면 원통함을 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상흥에게 관아에 고발할 것을 권했다. 한편 김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광하여 바보천치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흥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상흥은 그냥 묻고 지나갔다. 아마도 관아에 고발할 경우 오히려 아버지의 민망한 죽음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계모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어머니인 김씨가 곤경에 처하는 것이 이상흥으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이상흥의 이런 결정에 대해 유교적 시각에서 집필된 실록은 극도로 비판적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되지 못할 사람이다.’ 아버지에게 큰 불효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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