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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은 백제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전사(戰死)한 아버지로부터 상속 받았다. 서기 378년 백제군 3만명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왕은 겨우 성을 지켜 냈다. 아버지를 죽인 백제는 그에게 증오심을 주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도 남겼다.

어린 시절 소수림왕은 전연(前燕)의 침공으로 일어난 비극을 샅샅이 목격했다. 아버지 고국원왕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쳤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개처럼 끌려갔다. 죽은 할아버지 시신이 볼모가 되었고, 수도의 거의 모든 사람은 침략군의 노예로 전락했다(342년).
 


아버지 고국원왕은 그렇게도 고구려에게 몹쓸 짓을 한 전연의 모용 황에게 굽실거려야 했고, 모든 것을 다 잃고 거지 신세가 됐지만 남은 재정을 털어 할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와야 했다. 하지만 전연은 더욱더 강해졌고, 중원을 차지한 제국이 됐다. 자신이 왕태자에 책봉된 그해(355년) 할머니가 전연에서 돌아왔다. 그동안 저자세로 굴욕적인 재물과 인질을 바친 결과였다.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었다. 370년 그렇게도 몹쓸 짓을 한 전연이 전진(前秦)의 일격을 받고 멸망했다. 중국 대륙에서 숙적이 사라지고 우방 전진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듬해 아버지가 전사하고 그는 운명에 떠밀려 왕으로 즉위했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처지를 알고 있던 전진의 왕 부견(堅, 338~385년)이 불상과 승려를 보냈다(374년). 영혼의 상흔은 그를 불가(佛家)에 귀의하게 했다. 승려들이 오자 그는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워 머물게 했다. 불교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기른 그의 영혼은 이미 부처의 경이로운 세계에 가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주변 여건은 점점 악화되었다. 378년 가뭄과 전염병이 고구려를 휩쓸었고, 이 틈에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해 8개 부락을 박살내고 많은 사람들을 잡아갔다.
 

잡혀간 이들은 고구려의 북쪽 변경 초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고구려에 전마와 가축, 육류를 공급하고 기병 전력까지 제공하던 사람들이었다. 그 대가로 고구려는 생필품과 겨울을 넘기는 데 필요한 곡물을 정기적으로 공급했다. 하지만 계속된 가뭄과 흉년이 고구려의 경제력을 고갈시켰다.

 



유목민은 더 이상 고구려에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거란이 다가오자 미련 없이 고구려를 떠났다. 소수림왕은 절망에 빠졌다. 남쪽에서 백제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잠재적인 기병 자원이 증발한 것이다.
 

나쁜 일은 겹치는 법. 중국 대륙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383년 우방인 전진의 부견이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東晋)에게 대파 당했다. 그 후 전진은 급속도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듬해 전연 모용씨의 일족인 모용수는 흩어진 선비족들을 규합해 큰 세력이 됐다. 역사에서 이를 후연(後燕)이라고 한다.
 

우방을 잃고 다시 강력한 적을 맞게 된 소수림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고난의 삶에 지쳤고 왕 노릇에 신물이 나 있었다. 남쪽에 숙적 백제가 노리고 있는데 모용수가 다시 선비족을 결집했다. 절망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383년 11월이었다.
 

동생 이련(고국양왕)은 형으로부터 전쟁과 기아를 건네받았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형 소수림왕이 염려했던 대로 모용수는 세력을 급격히 확장했고, 이듬해인 384년 후연의 황제로 즉위했다. 고구려에는 가뭄과 흉년이 겹쳤고, 백제와의 싸움도 계속됐다. 388년 여름, 비가 오지 않아 몹시 가물었다. 가을걷이에 지장을 주는 재해였다.

이듬해 사람들은 어김없이 굶주렸다. 거기다가 그해 가을 백제가 남쪽 국경으로 쳐들어와 약탈했다. 390년 가을에도 이 악다구니는 되풀이됐다. 백제의 장군 진가모가 현재 개성 부근의 도압성을 공격해 쳐부수고 2백명의 사람들을 잡아갔다. 아쉽게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백제와의 접경지역이 고구려의 최대 곡물 생산지였다.
 

비참한 시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거기서 태어난 자는 어디까지나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담덕(광개토대왕)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메마르고 얼어붙은 땅에서도 새싹이 돋아나게 마련이다.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가 될 인물이 자라고 있었다.
 

4년 전(386년) 고국양왕은 아들 담덕을 왕태자로 임명했다. 담덕은 그늘진 백부(소수림왕)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자랐고, 무엇이 어른들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지도 알게 됐다. 마음의 무게감으로 일찍 철이 들었고, 왕좌는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천근과 같은 짐을 지는 자리임을 알았다.
 

담덕은 그의 백부나 아버지가 가진 모용선비(전연·후연)나 백제에 대한 공포심은 없었다. 직접 겪지 않았기에 갖는 자신감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으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공포란 마음의 상처이며 정확한 판단을 방해한다. 담덕은 태자 시절 아버지 고국양왕이 후연에 대해 소극적이고 백제에 대해 힘들어하는 것을 답답하게 느꼈었다.
 

직전 385년 11월 고국양왕은 현토와 요동을 우현의 모용농에게 빼앗겼다. 고구려가 그 지역을 점령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잃은 것이다. 하지만 연은 전연보다 강력하지 않았고, 일진일퇴의 적수였다. 후연의 선비족들은 이리가 가 되듯이 중원에 들어와 몇 세대를 살면서 야성을 잃어 갔다. 이미 숙번(熟蕃: 중국화된 유목민)이 된 것이다.
 

그런 후연이 서북 초원에서 대두된 선비족 탁발부(北魏)와 마주쳤다. 탁발부는 문화 수준이 낮았지만 용감한 전사였다. 그들은 무한정에 가까운 인적자원을 외몽고에서 획득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야생성이 강한 생번(生蕃: 초원 유목민)이었다. 탁발부 북위와의 전쟁에 모용수의 마지막 남은 생애가 바쳐졌다. 그토록 강성했던 후연은 밀렸고, 고구려를 침공할 여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후연의 최대 적 북위의 상승세는 확실히 국제관계의 균형을 뒤엎는 예상 밖의 결과였고, 고구려의 젊은 군주에게 더없는 행운이었다. 후연이 힘을 잃지 않았다면 담덕이 백제를 찍어 누르고 초원으로 진출하여 광대한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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