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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미국 LA에 출장 갔다가 반나절 시간이 나기에 음반가게에 갔다. LA 선셋대로에는 ‘아메바 뮤직’이라는 유명한 중고 음반가게가 있다. 그 규모가 광화문 교보문고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음반 박람회장을 연상케 하는 이곳에는 록을 비롯해, 흑인음악·재즈·블루스·댄스·일렉트로닉 할 것 없이 지구상 모든 장르의 음악이 CD와 LP 형태로 팔린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섹션만 해도 작은 음반가게만 한 규모다.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구하기 무척 어려운 중고 CD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가격표가 흰색인 것은 10달러 이상으로 비싼 편이고, 노란 가격표는 8~9달러, 초록색은 4~5달러다. 가끔은 2~3달러짜리 중에서도 오랫동안 찾아왔던 음반을 건질 때가 있다.



우선 가장 좋아하는 밴드 ‘레드 제플린’의 CD가 있는 곳으로 갔다. 물론 나는 이 밴드의 모든 정규앨범과 편집앨범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틀렉(bootleg)’이라고 불리는 비공식 음반 중에 혹시 못보던 것이 있는지, 이 밴드에 대한 헌정앨범을 낸 새로운 밴드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역시! 레드 제플린에 대한 헌정앨범을 낸 여성밴드가 있었다. 그 이름은 ‘레즈 제플린(Lez Zeppelin)’. ‘레즈’가 ‘레즈비언’의 준말이니 얼마나 재미있는 이름인가. 이런 음반은 무조건 사줘야 한다. 게다가 가격도 5달러로 무척 싸다.

이후 ‘중고 록 CD’ 섹션을 A부터 Z까지 빠른 속도로 훑었다. 뮤지션의 이름을 쭉 보며 지나치다가 ‘저거다’ 싶은 게 있으면 뒤적여보는 식이었다. 매우 빠르게 훑는다고 했는데도 기나긴 진열대의 마지막 밴드인 ‘지지탑(ZZ Top)’에 이르자 3시간이 거의 다 지나갔다.

이 음반가게의 2층은 온갖 중고 DVD의 천국이다. 이곳에 올라가 1층 매장을 내려다보았다. 수없이 늘어선 거대한 CD 진열대의 행렬 속에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노소가 음반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기쁨과 동질감으로 충만한 채 속으로 되뇌었다. ‘이것 봐. 미친 사람들이 이렇게 많잖아. 그러니 나도 미친 게 아니야.’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다. ‘북오프’나 ‘디스크 유니온’ 같은 중고 음반가게에 가면 LA보다는 적지만 역시 혀를 내두를 만한 규모의 중고 음반 섹션이 있다. 그곳에서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음반을 꺼내 들어보고 고르며 시간을 보낸다. 미국이나 일본에 출장 갈 때면 늘 그 모습이 부러웠다.

이제 주변에서 CD 듣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꺼내 음반을 갈아 끼웠더니, 앞에 앉은 여중생들이 ‘저 아저씨는 가구를 들고 다니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한국은 너무 많은 것이 너무 빨리 사라진다. 언제나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더라 하는 것은 사찰과 왕릉 정도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동네에 오랜만에 갈 일이 생겨 가봤더니, 그때 있었던 거의 모든 가게와 집들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냄비 속 물 끓듯 하는 유행의 경박함으로 볼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의 이 속도전(速度戰)이 두렵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기 전에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미리 부를 수 있는 버튼도 별로 마땅치 않다. 그렇게 일상까지 효율을 극대화하면 우연도 충동도, 사는 맛도 없어지지 않을까. 이번 주말엔 새로 사온 중고 CD들을 하나씩 닦고 들어보면서 한껏 게으름을 피울 생각이다.

글·한현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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