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438년 송나라(劉宋)의 문제는 풍홍을 구출하기 위해 고구려에 군대를 보냈다. 남조 송의 이 같은 행보는 풍씨 집단과 연결해 고구려를 위압해서 북위의 측면에 세력 근거를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왕백구 휘하의 송군을 실은 배가 요동만에 나타났고, 7천명이 상륙을 개시했다. 송군은 풍홍이 감금된 북평(瀋陽)의 안가로 진군할 작정이었다. 손수(孫漱)와 고구(高仇)가 이끄는 고구려 군대가 이를 막기 위해 출격했다.
하지만 고구려 군대는 송군에게 급습을 당했다. 고구려 역사상 양자강 남(南)의 군대와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고구려 장군 고구가 여기서 전사했다. 하지만 송군은 고구려 영토 내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고구려군과 그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고, 군수품이 고갈되어 갔다. 얼마 가지 않아 송군은 궤멸했고, 송의 장군 왕백구가 포로로 잡혔다. 7천명의 송군 가운데 따뜻한 남쪽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풍홍을 결코 송에 넘겨주지 않았고, 송과 풍홍의 결합을 방기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북연의 망명집단을 내세워 북중국 방면으로 진공할 의도가 없음을 북위에 분명히 밝혔다.
장수왕은 멸망한 북연의 문제로 북위와 소모적인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패장이 된 왕백구는 고구려 사절단과 함께 배를 타고 송으로 향했다. 그를 동아줄에 묶어 죄수를 호송하듯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절은 송의 문제를 만나 말했다.
“왕백구 등이 제멋대로 고구려를 침범해 사람을 죽였으므로 이렇게 잡아 송환합니다. 저희 왕께서 처벌을 원하십니다.”
송 문제는 왕백구 등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고구려 사절이 본국으로 돌아간 직후 석방했다. 현명한 장수왕은 왕백구 등을 잡아 처형하지 않고 본국으로 송환했다. 장수왕은 송과의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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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민한 문제도 장수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고구려 사절의 요구대로 왕백구 등을 일단 감금했다. 두 군주는 정치에서 진실이란 윤리도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와 송은 서로에게 필요한 상대였다. 강적 북위를 두고 양국은 싸울 수 없었다. 고구려는 북위와 대립 관계를 지속하면서 남조의 송과 북의 유연(柔然)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장강의 송과 사막 이북의 유연을 중개해 주기도 했다. <위서> 백제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불의와 잘못은 한둘이 아니다. (고구려는 북위에 대해) 겉으로는 겸손한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고구려는) 남으로 유씨(송)와 통호(通好)하고, 혹은 북으로 연연(유연)과 맹약해, 서로
순치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북위의 땅)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유연·송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북위를 견제하고 있었고, 이는 변함없는 고구려의 정책이었다. 한반도 서남에 있는 백제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로 일반화된 사실이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와 강력한 기병단을 소유한 북위가 송나라를 정복하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회하 이남의 광활한 평지는 모두 물이 차 있어 북위의 기병이 진창에 빠져 꼼짝도 할 수 없다. 회하를 넘어선다고 하더라도 바다와 같은 양자강이 있다. 바다를 보지 못한 유목민 북위 사람들이 수전에 능숙할 리 만무했다.
제약은 또 있었다. 사막 이북에 유목제국 유연이 버티고 있었다.
유연의 성장 과정은 북위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서로는 서역의 언기(焉耆)에서 동으로는 만주와 접한 흥안령에 이르는 북아시아를 제패한 이후에도, 유연은 북위와 상쟁을 지속했다. 양국 간의 대결에서 때로는 유연 군이 북위의 수도를 공격하기도 했고, 북위 군이 고비사막을 넘어 유연을 추격하기도 했다.![]()
<위서>에는 북위가 사방으로 포위된 형세를 언급하고 있다.
<북으로는 험윤(유연)이 침구해 올 위험이 있으며, 남으로는 형양(남조 송)이 복종해 오지 않고, 서로는 토욕혼의 막힘이 있으며, 동으로는 고구려의 어려움이 있어 사방이 평온하지 못하다.>
북위는 유연과 남조 송을 상대로 장기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구체적인 실례를 보자.
448~449년 북위는 유연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자 송이 그간 추진해 오던 북벌을 구체화했다. 450년 7월 송은 북위를 공격했다. 북위는 여기에 반격을 가해 송군을 격퇴했고, 그해 9월 태무제는 송에 대한 원정에 착수했다. 송군이 밀렸고, 12월 북위군은 송의 수도 근방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초원에서 유연이 움직임을 보이자 이듬해 1월 북위는 송과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북으로 철군했다.
451년 1월 남쪽에서 회군한 북위 군은 그해 6월과 10월에 북쪽 음산으로 이동해 유연에 대해 무력시위를 했다. 북위 군이 송에 대승한 후 곧 회군한 주된 요인은 송과 장기전을 벌일 경우 염려되는 유연과 고구려의 침공을 의식한 것이었다. 북위의 태무제는 우려하던 일이 발생할 때마다 분통을 터뜨렸다. 카리스마를 소유한 전사 황제인 태무제가 전쟁터에서 적에게 욕을 할 수밖에 없는 바보스런 모습을 보였다.
고구려와 북위의 적대관계는 462년 고구려가 사절을 파견하면서 해빙기를 맞았다. 465년 이후부터 고구려는 북위에 매년 사신을 파견했고, 그에 부응해 북위 사신이 빈번하게 내방하는 등 양국 간의 관계가 급속히 개선됐다.
그해 북위 문성제(452~465)가 죽고 풍태후(馮太后)가 막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태후 풍씨는 북연 황제 풍홍의 손녀다. 고구려 장수왕은 438년에 풍홍과 그의 자손 10명을 참살한 바 있었다. 고령이던 장수왕의 입장에서 풍태후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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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