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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아무리 싸우더라도 각방을 쓰지는 않겠습니다.’(신랑)
‘다투더라도 아침밥은 꼭 챙겨주겠습니다.’(신부)
‘비자금을 위해 딴 주머니는 절대로 차지 않겠습니다.’(신랑)
‘남편의 비자금을 눈감아 주겠습니다.’(신부)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가 내놓은 ‘결혼매니페스토’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면 어떨까. 어느새 남편은 딴 주머니를 꿰차고 아내는 그 딴 주머니를 ‘색출’하려고 눈을 부릅뜨지 않을까.

매니페스토(Manifesto)란 대통령 등 공직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들이 유권자에게 내놓는 정책공약을 가리킨다. 후보자들은 반드시 실천 가능한 공약을 내걸고, 만일 당선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반드시 지키라’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은 비단 정치판만이 아니다. 기업과 소비자, 관청과 주민들 사이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생활 속에서 부모와 자녀, 부부, 친구 사이에서도 약속을 지키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취지에서 시작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결혼매니페스토’다. 신랑·신부가 서로에게 약속을 내걸고 그것을 지켜 나가게 하는 것으로, 사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의 모든 결혼식에서 행해져 온 혼인서약의 ‘서약’이 바로 결혼 또는 결혼매니페스토인 셈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서약은 ‘항시 사랑하며 존중하고…’ 식의 추상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에 비해 결혼매니페스토는 좀 더 구체적인 ‘약속’이라는 것이다.

2006년 초부터 시작된 매니페스토운동에 참여해온 필자는 그 후부터 모든 주례는 매니페스토 주례로 서기로 했다. 그래서 주례 의뢰가 들어오면 으레 당장부터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결혼매니페스토를 몇 가지씩 적어 와야 주례를 서 주겠노라고 위협(?) 아닌 위협을 한다. 그러면 신랑·신부들은 각자 결혼 후 실천 가능한 약속들을 써서 보내온다.

‘매년 첫눈이 오는 날이면 사랑하는 아내에게 꽃다발을 바치겠다’는 신랑의 매니페스토에 하객들의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매일 밤 남편을 위해 기도를 하겠다’는 신부의 약속은 하객들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주례를 서다 보면 매니페스토에도 세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청소·설거지를 도맡아 하겠다’는 신랑도 많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양가 부모님께 1주일에 한 번씩 똑같이 전화를 드리겠다’고 양성평등적 약속을 하는 부부도 있다.

‘하루에 한 번씩 뽀뽀를 해 주겠다’ ‘한 달에 한 번씩 사랑의 편지를 쓰겠다’ ‘아내에게 발마사지를 해주겠다’ ‘남편의 발을 닦아 주겠다’

등등을 약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약속이 결혼 이후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지, 이 약속을 얼마나 기억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약속은 지켜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5월은 가족 사랑의 약속을 되새겨 보기 좋은 시간이다. 지키지 못하고 있는 약속이 있다면, 가족끼리 다시금 실천 가능한 약속을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어떤 것보다 근사한 선물이 될 것이다.

글·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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