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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342년 11월 선비족(鮮卑族) 모용씨의 전연(前燕)이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고구려 조정에서 방어력 배치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북쪽 평지에 주력을 배치하고 남쪽 험지에 나머지 병력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아우 무(武)가 주력 5만명을 이끌고 북쪽 길로 가고, 고국원왕(故國原王, 16대, 재위 331?371)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남쪽 길로 갔다. 왕은 전연의 주력이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했다.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왕의 액운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접근로 판단이 가져온 인재(人災)였다.



전연의 왕 모용황은 주력 4만을 직접 거느리고 남쪽 길로, 그의 신하인 왕우(王寓)의 병력 1만5천이 북쪽 길로 왔다. 초반 남쪽 길에서 고구려군은 선전했다. 고구려 군대가 험지의 길목을 장악한 상태에서 전선이 교착됐다. 얼마 가지 않아 소강은 깨졌다. 전연의 장군 선우량이 소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진중으로 돌진했다. 많은 고구려군이 있었지만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영웅적인 분투는 당하는 고구려군에게는 두려움을 주었고, 전연군(軍)의 사기를 올렸다.


진(陣)에 균열이 생기자 전연군은 노도와 같이 들어왔다. 고구려의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했다. 전연의 기세에 고구려군은 밀렸고,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도 갖지 못했다. 남쪽 고구려군이 괴멸당했다. 병력이 거의 없었던 환도성으로 전연의 군대가 들어왔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처는 포로가 되었다. 이 둘을 두고 도주하던 왕은 어떠한 생각에 잠겼을까.


같은 시간 북쪽 평지의 고구려군은 우세한 기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군 5만은 전연군 1만5천을 전멸시켰다. 소식을 접하고 당황한 모용황은 북쪽의 고구려군이 환도성에 도착하기 전에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먼저 모용황은 대대로 물려 내려온 고구려의 신기와 보물들로 가득찬 왕실의 창고를 약탈했다. 궁궐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해체한 그는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발굴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삽질을 했다. 관 뚜껑이 열리고 시신이 나왔다. 환도성에 거주하던 남녀 5만이 줄줄이 묶였다. 골짜기에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이듬해인 343년 2월 고구려 사절이 전연의 수도 용성(龍城, 요령성 조양)에 도착했다. 고국원왕의 국서가 모용황에게 전달됐다. 왕이 모용황에게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천 가지의 진기한 보물도 바쳤다. 모용황은 그 대가로 불과 수개월 전에 고구려에서 파온 미천왕 시신을 주었다. 큰 수확이었다.


무덤을 잃어버리고 구천을 떠돌 아버지 미천왕의 기나긴 고통을 생각하면서 고국원왕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지만 살아있는 어머니는 방면되지 못했다. 모용황은 그녀를 인질로 삼아 왕의 의지를 계속 억압했다. 345년 10월 모용황은 고구려를 침공해 남소(南蘇)를 빼앗고 그곳에 전연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왕은 어떠한 반격을 할 수도 없었다.


전연의 모용황이 죽고 모용준(慕容儁)이 즉위했다. 349년 12월 고국원왕은 전연에 사신을 보냈다. 여기에는 후조(後趙)와 내통하다 고구려에 망명하여 용준이 증오하던 송황(宋晃)이라는 자도 묶인 상태로 동행했다. 왕은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모용준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전연 세력은 팽창해 하북의 일부를 후조로부터 빼앗고 수도를 지금의 북경 부근인 계( )로 옮겼다(350년). 352년에 모용준은 후조의 염민( )을 공격하고 패퇴시켰다. 이로써 전연은 관중을 제외한 하북을 대부분 차지하게 됐고, 수도를 업(하북성 림창현)으로 옮겼다.



355년 12월 고구려 사절단이 업에 도착할 당시 전연은 강력한 제국으로 변모해 있었다. 공물과 함께 인질도 데리고 온 사절단은 모용준에게 왕모의 송환을 부탁했다. 왕모는 꼭 13년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잡혀간 왕비는 데려오지 않았다. 국제 상황의 변화 때문에 이후 양국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왕은 황해도지역을 두고 백제와 국지전을 벌이고 있었고, 전연은 서쪽에서 부견의 전진(前秦)이 팽창하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5년 후인 370년 전진은 낙양과 진양(晋陽, 산서의 태원)을 연속으로 함락시키고 노천( , 탁장하)에서 모용평이 이끄는 전연의 15만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이어 전진군은 전연의 수도 업을 포위했다.


전연이 망하자 그 실권자 모용평은 고구려로 망명했다. 모용평이 왔을 때 고국원왕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아버지의 시체를 파내갔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왕실의 보물을 약탈하고 우리를 그토록 철저히 유린한 전연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왕은 그 망명객을 동여매 전진에 보냈다.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중국 최강국으로 부상한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공포의 대상이던 전연의 멸망을 본 왕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남쪽 백제와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나이가 들어 누추해진 왕을 향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듬해인 371년 왕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성에 머물고 있었다.


3년 전부터 백제에 밀리고 있었다.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에게 패해 자신의 병사들 5천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다시 군대를 소집했지만 임진강에서 매복에 걸려 많은 병력을 잃었다. 또 다시 군대를 모아 ‘반걸양’에서 대진했다가 백제에 약점을 간파당해 참패를 했다.


근초고왕의 백제는 강했다. 왕은 힘없이 평양성으로 들어갔다. 371년 겨울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힘이 부쳤다. 그래도 평양성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것의 상실은 남쪽의 소중한 곡창지대의 포기를 의미하고 국제무역에서 백제에 모든 이권을 잃는 것을 말한다.


371년 겨울 10월 23일 성이 함락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왔다. 화살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노인이 된 왕은 다니면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그러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백제군이 물러나고 시신은 수레에 실려 국내성(國內城)으로 향했다. 고구려 전체가 비탄에 잠겼다. 전연의 팽창기에 청?중년기를 보냈고, 이어 백제가 흥기하던 시대에 노년을 맞이했던 고국원왕. 그도 시대에 무력(無力)한 개인이었다. 그로부터 104년 후 한성백제의 비극은 여기서 배태되었다. 475년 증손인 장수왕은 워커힐호텔 자리에서 백제 개로왕과 그 가족들을 공개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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