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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좋은 부자들




모두들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나 가지면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크기가 다를 것이다. 아무래도 돈 만지는 이들은 그 크기가 클 듯하다.

반면에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다른 가치를 더 크게 생각한다. 그래서 무작정 큰돈만을 꿈꾸지는 않는다. 다만 경제적으로 ‘난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부자다.

돈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제학은 사람들이 죄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산과 유통활동을 한다고 가르친다. 또 소비자로서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비활동을 한다고 가르친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경제활동이라고 가르친다. 확실히 돈만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본다면 그럴지 모른다. ‘잇속의 경제학’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경주 최부자는 왜 ‘만 석 이상은 벌지 말라’고 했을까. 만 석이 아니라 2만 석, 3만 석도 벌 수 있어서 벌면 그만일 터인데, 왜 그것을 벌지 말라 했을까.

또 왜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고 했을까. 흉년에 돈 없는 이들의 싼 땅들을 마구 사들이면 떼돈을 벌 수 있을 터인데, 왜 그것을 사지 말라 했을까. 여기에는 기존의 경제학이 가르쳐 주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인간은 확실히 이윤동기와 효용동기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일견 그것들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우리네 삶은 그러하지 않다. 사람들은 평소 정신없이 돈벌이에 나섰다가도 간혹 어느 순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어떨 땐 내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 나로 인해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오는 때도 있다. 내가 이 순간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잠시 속임수를 써서 푼돈을 벌었다 해도 돌아서서는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내 안의 양심이다. 우리들의 양심은 우리에게 욕심을 내려놓을 것을 요청한다. 약탈적 부자가 되지 말고, 내 잇속을 위해 남의 가슴에 못 박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돈 있다고 이윤의 극대화만을 위해 마구 베팅을 하지 않게 한다. 그래서 원유사태가 발생하면 물가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소비부터 줄이게 한다. 바로 양심으로부터 요구되는 ‘절제의 경제학’이다.

이 같은 절제는 행동의 목표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과 사후처리에서도 요구된다. 왜 선구적인 기업들은 적법경영, 윤리경영을 하겠다고 나설까. 왜 미국의 일부 부자들은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고 전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할까. 왜 카네기는 ‘부자로서 죽는 것은 수치’라고 했을까. 이렇게 절제를 실천해 가면서도 잘 먹고 잘사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좋은 부자들이다.

부디 이런 좋은 부자들이 많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부자들이 많아지면 우선 자신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하루 세 끼를 걱정하며 고통 받는 수많은 이웃들에게도 큰 기회가 제공될 것이다. 그 많은 경제학 교과서도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동물적 탐욕을 전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절제와의 조화를 찾아 새로운 삶을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가난했던 탓으로 자신도 모르게 돈, 돈 하는 세상에 빠져들었다. 이제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반성한다. 내 안의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무욕(無慾)의 그 자리에서 얼마나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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