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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수없이 고민한 者, 그는 승리한다




393년 8월 가을 어느날 백제 아신왕(阿莘王, 17대)은 그의 외삼촌 무(武)에게 말했다. “관미성은 우리 백제의 중요한 요새다. 그런데 지금 그 성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으니 분하고 애석하다.”

무는 군대 1만명을 모집해 관미성을 포위했다. 성 안으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러나 관미성은 꿈쩍도 않고 버텼다.

백제군의 식량은 떨어져 갔다. 재보급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치밀하게 배치된 고구려 요새들의 방해를 받았다. 결국 무는 수많은 시신을 뒤로하고 철수를 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394년 7월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참패를 당한 무의 군대는 한 달 후 세번째 도전을 했다. 이번엔 임진강변이었다.

백제군이 진군해 오자 광개토왕의 7천명 군대는 대열을 갖추었다. 병력은 백제군이 더 많았지만 기병에서는 고구려가 앞서 있었다.

전투에서 기병 전력이 우세하면 상대편은 쉽게 덤비지 못한다. 기병들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열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병이 약한 측은 항상 제약을 받았다. 결국 아신왕은 자신의 군대 8천명이 싸우겠다는 의지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했다.

이어 초원에서는 더 나쁜 소식이 들려 왔다. 395년 후연의 주력이 내몽고의 참합피에서 북위군(軍)에게 참패했다는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수세에 몰린 후연은 397년 화북(華北)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요서의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다. 당시 북위의 진취적인 수령 탁발규(북위 태조 道武帝, 386~409)의 등장과 성공적인 팽창은 후연을 잠식하는 과정이었다.




광개토왕의 가장 큰 라이벌(후연)이 다른 이에게 정통으로 맞아 다운되어 링 위에 올라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소문은 요하를 넘어 삽시간에 만주와 한반도 전체에 퍼졌다. 백제의 아신왕의 입에서 저음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북쪽으로부터의 족쇄가 풀린 광개토왕이 앞으로 더 설칠 터이다.

더구나 후연의 모용수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후연의 명운은 뻔했다. 백제도 암울해졌다.

하지만 광개토왕은 쇠퇴일로에 있는 후연의 정원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무르익은 과실을 보았다. 395년 광개토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서북방의 초원으로 나아갔다. 부산(富山)과 빈산(貧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렀다.

요하 북쪽의 광활한 초원에서 고구려 기병들은 6백~7백 개의 유목민 부락을 발견하고 무수한 소·말·양을 노획했다. 왕은 가축을 길러 군수자본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목민에게서 빼앗아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후연이 힘을 잃자 고구려 군대가 초원에서 활개를 쳤다. 395년 그곳에서 확보된 물자는 이듬해 남쪽의 백제를 치는 데 활용됐다. 춘천에서 충주에 이르는 한강 중상류지역을 모조리 장악했다(광개토왕비문).

당시 물자 수송은 강을 주로 이용했으며, 수취된 물자는 물의 흐름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왔다. 한강 하류에 있는 백제의 수도 한성은 서해안의 바다도 이용했지만 강을 이용해 내륙의 곡물과 물자를 수취해 왔다.

이로써 한성은 배후지역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됐고, 고구려에 대한 저항도 약해졌다. 고구려군이 강을 건너 한성 부근에 육박하자 백제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저항했다. 하지만 격퇴되었고, 고구려군은 궁핍해진 한성을 포위했다.

아신왕은 백기를 들었다. 광개토왕 앞에서 성대한 항복의식이 거행되었다. 백제왕은 남녀 생구(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의식의 제물로 바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익이 되지 않는 영토 확장은 의미가 없다고 본 광개토왕은 한성을 점령하지 않고 귀국했다.


397년 고구려군이 물러가자 아신왕은 자신의 태자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삼국사기). 아신왕은 대규모의 문화적·물질적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일본열도에 있는 여러 호족은 백제가 주도하는 국제교역에 이권이 걸려 있었고, 백제의 패배는 그들의 이권상실을 의미했다.

399년 광개토왕이 머물고 있던 평양에 신라 내물왕이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왜군이 신라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우리 신라인들을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로써 광개토왕의 고구려군과 왜군이 신라의 땅에서 격돌하게 된다. 백제와 경쟁하고 있던 고구려에 신라는 이용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이듬해 광개토왕은 군대 5만명을 동원했다. 철원에서 충주와 단양에 이르는 한강 중상류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평양성에서 출발한 고구려 군대는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속적으로 보급받을 수 있었고, 소백산 줄기를 넘어선 이후에는 신라가 보급을 담당했다.

신라군을 상대로 위력을 보여준 왜군은 고구려군을 만나자 힘을 쓰지 못했다. 천재적인 군사지도자가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역전의 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난쟁이 왜군은 무너졌고, 낙동강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그들을 지금의 경남 함안까지 추격해 궤멸시켰다. 남쪽에서 올라온 왜군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곳에 자신의 무덤을 남겼다.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빈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보면 연민의 대상일 수 있다. 전쟁이란 항상 상대를 얕보면 지는 법이다. 그는 전쟁 때마다 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했다.

당시 고구려는 왕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선대의 패전이란 유산을 그가 걸머지고 있었다. 수세를 공세로 바꾸기 위해서 영웅을 필요로 했다. 움츠려 있던 고구려인들의 마음에 긍지를 심어주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왕은 “지는 것이 무섭다”고 항상 스스로 되뇌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자신의 카리스마 상실로 이어질 수 있었고, 그를 따르며 충성하던 부하들의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운명을 걸머진 자는 강하지만 때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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