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407년 지방정권으로 쇠락한 후연(後燕) 조정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주 모용희(慕容熙)가 수도를 비운 사이였다. 정신없는 군주 때문에 나라가 당장 망하겠다는 우려가 후연에 팽배해 있었다.
정쟁(政爭)에 연루돼 도망갔던 후연 장군 풍발(馮拔)은 그의 종형 만니(萬泥) 등 22인과 거사를 공모했다.
풍발은 고구려인 모용운을 왕으로 추대하고 병력 5천명을 동원해 성문을 걸고 지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희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 용성의 북문을 공격했지만 패했다. 왕좌에서 밀려난 모용희는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숲 속으로 도망가 숨었지만 곧 체포됐다.
당시 후연은 쪼그라들 대로 든 상태였다. 중원의 수복을 꿈꾸던 후연이었다. 그러나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북위는 강대했고 동쪽의 고구려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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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인 401년 북위가 후연의 영지를 함락시키자 북상한 광개토왕이 후연의 숙군성을 차지했다. 많은 사람과 재물이 고구려의 손으로 들어왔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곳이었다. 다음에 언급하겠지만 숙군성은 35년 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403년 11월 광개토왕이 또다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확보했다. 이듬해 정월 후연의 모용희가 반격을 해왔다. 모용희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고사(枯死)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가 망하려고 하니 똑똑하지 못한 인물이 왕이 되는 것일까? 후연의 군주 모용희는 즉위하자 자제심을 잃었다. 그는 이기적이며 허황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구려 요동성 공격을 지휘하면서 후연 군주 모용희의 무능한 본 모습이 드러났다. 후연군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려 할 때 모용희는 군대가 성 위로 오르는 것을 막았다. 그는 말했다. “먼저 성에 오르지 마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
전쟁에서는 적에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모용희의 허황된 명령이 요동성을 살린 셈이다. 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이 귀중한 시간을 이용해 방비를 강화할 수 있었다.
모용희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군대를 돌려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만든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모자란 사람이요, 전쟁에 여자와 시종들을 잔뜩 데려오는 20세의 방만한 군주였다. 그는 부소의( 昭儀)를 지극히 총애했다고 한다(진서).
407년 7월경 망국(亡國) 왕실의 종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는 끌려가 처형되었고, 그가 뿌린 씨앗으로 세상에 나온 많은 남자 아이도 화룡성의
북쪽에 매장됐다. 아마도 여자 아이들은 노비로 팔렸을 것이다.
모용희는 그토록 사랑했던 부소의의 무덤에 함께 매장됐다. 쿠데타의 주동자 풍발이 모용희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준 셈이다. 모용수가 후연을 일으킨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풍발은 허수아비 왕을 세웠다. 모용운이라 불리는 고구려인이었다. 후연에는 332년 모용황의 침공 때 잡혀간 고구려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모용운은 그들의 후손으로 본명은 고운(高雲)이었다.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자신이 고구려인이라 자처하고 살았다.
고운은 모용수의 넷째 아들인 모용보가 태자였을 때 궁에서 시위하는 시동이었다. 모용보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됐고 모용씨의 성(姓)을 하사받았다. 미래가 약속됐다. 하지만 398년
모용보가 사망하자 그의 운명은 아래로 굴러 바닥을 쳤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후 풍발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고운은 왕위에 옹립됐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한 자리였다.![]()
407년 후연의 모용희가 실각하고 고구려계 고운의 정권이 들어서자 광개토왕은 곧바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삼국사기>는 ‘사신을 북연(후연)에 보내 종족의 정을 베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은 그해 편안한 마음으로 군대를 남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대규모 병력인 5만명을 집중하여 마음 놓고 백제를 절단 내겠다는 생각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에 승리한 결과 1만 벌의 갑옷과 막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백제군은 이 전투에서 다시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받았다.
전선에서 돌아온 광개토왕은 408년 3월 북연의 왕 고운이 보낸 사절을 맞이하였다(자치통감). 그것은 전년도에 고구려의 축하사절단 파견에 대한 답방이었다. 하지만 고운은 얼마나 갈지도 모르는 실권이 없는 왕이었다. 그것을 대왕은 잘 알고 있었다.
고작 1년 뒤인 409년 풍발은 정해진 각본대로 고운을 제거해 후연을 장악한 후 국호를 북연(北燕)으로 개칭했다. 고구려에 망명해 있던 풍발의 동생 풍비(馮丕)는 형이 정권을 잡자 귀국했다. 이후 북연이 존속한 기간에 고구려와의 우호 관계는 지속됐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인 고운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토도 달지 않았다.
광개토왕은 왜 고운의 암살을 명분 삼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북연을 정복하지 않았을까? 요서를 고구려의 손에 넣고 나아가 중원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면 우리 역사의 범위는 넓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당시 중원이란 바늘 하나 꽂기도 힘든 곳이었다. 흉노, 선비, 갈, 강, 저 등 5개의 유목부족이 북중국에 들어와 16개의 나라를 세우고 흥망 하는 모습을 고구려는 생생히 목격했다.
북연은 그 16개 나라 가운데 마지막 국가였다.
그들은 대부분 단명했다. 모용선비처럼 망하고 다시 나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예외였다. 북중국과 중원이 수족관이라면 다섯 종류의 유목민들은 그곳에 들어와 사는 물고기였다.
물론 다섯 종류라 해도 실제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가령 선비족의 경우 모용씨, 우문씨, 탁발씨, 단씨 등 각기 다른 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문제는 수족관 내부에 소생의 순환 사이클인 먹이사슬이란 것이 없다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육식성 물고기 상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그들은 싸웠다.
광개토왕 당시 북중국이라는 수족관에 있던 상어들은 서로 잡아먹다 다 사라지고 한 마리의 거대하고 난폭한 상어와 상처를 입고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작은 상어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전자가 북위이고 후자가 북연이었다. 고구려가 그 수족관에 들어간다면 북위라는 크고 시퍼런 상어와 경쟁을 해야 했다.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이 끝나는 투기장에 뛰어들어야 위대한 왕일까?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해 39세에 죽을 때까지 전쟁을 해야했다. 그는 한시도 쉴 새 없이 남쪽의 낙동강에서 북쪽의 요하 사이를 오가며 사력을 다했고, 젊은 나이에 과로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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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