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두툼한 점퍼가 하나 생겼다. 폭신폭신한 솜으로 누벼져 있고 풍성한 토끼털 모자도 달렸다. 거기다 방수까지 된다니 이 옷만 입으면 동장군이 설치는 엄동설한에도 끄떡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치수다. 내가 입으면 솜이불을 두른 듯 크고, 내 남편이 입으면 작아서 우리 집에선 무용지물.
이렇게 따뜻하고 멋진 옷인데 나는 입을 수 없고 남 주자니 배 아프고, 변변한 고민거리조차 없이 대관령 산골짜기에 사는 나에게 마침내 고민거리가 하나 생긴 셈이다.
이 옷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얼핏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기실, 나의 속마음은 누구에게 거저 주는 것보다는 자반고등어 한 손 값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었다. 이렇게 산골짜기에 흰 눈이 푹푹 쌓이는 날 화롯불 위 양은냄비에 잘 익은 김장 김치를 척~ 깔고 고등어 지짐이라도 해먹으면 참 좋으련만, 그렇다고 명색이 시인(詩人)이면서 강릉 시장판까지 가져가서 “옷 사시오!” 고래고래 소리치며 팔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마을엔 선뜻 이 옷을 살 만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우리 집 외양간 소 잔등에라도 덮어줄까? 아니면 강아지집에 깔아줄까?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새옷이잖아!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하면서 하루이틀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설날도 지나고 한파주의보가 내린 어느 날, 산비탈에 사는 박씨 할아버지가 허름하고 얇은 점퍼를 입고 지나가시는 걸 보았다.
뛰어가 그 옷을 입혀 드렸는데, 어쩜! 그리도 딱 맞는지! 6·25전쟁 때 전차를 몰고 전쟁터를 종횡무진하였다는 할아버지, 지금은 외롭게 홀로 사는 박씨 할아버지에게 그 옷이 딱 맞는 것이었다.![]()
새 점퍼를 입고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그 옷을 입은 듯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평소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을 살펴보았더라면 좀 더 빨리 옷의 주인을 찾아주었을 텐데 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난번 한파주의보가 내렸을 때도 따습게 입으셨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빨리 한다. 오죽하면 외국에서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빨리, 빨리”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모든 일을 열정적으로 하고 빨리하면서도 남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일은 조금 느리고 게으른 듯하다. 내가 그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인 모양이다.
대관령 산골짜기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사는 내게 무슨 나눌 것이 있겠느냐, 나눔에 관해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딱 잘라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작거나 변변치 않은 것이라도 남 주기 아까워 가지고 있는 물건과 재능과 마음은 없는지 장롱이며, 지갑이며, 마음속을 찬찬히 뒤적거려 보아야겠다.
지난밤, 그 박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솜옷을 조금 더 일찍 드렸다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 가는 겨울이 조금 더 따뜻했을 것인데…. 문상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몸보다 마음이 몹시 추웠다.
글·유금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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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