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이달 초 회사에서 전 직원에게 하얀 봉투를 하나씩 나눠줬다. 봉투 속에는 5만원권 지폐 한 장과 사장님이 쓴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겨울이 깊어 갑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 겨울을 남모를 고통 속에서 매우 힘들고 답답하게 보내야 하는 분들도 많지요. 혹시 주변에 이런 이웃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이 봉투에 든 ‘돈 모양의 마음’이 따뜻하고 살갑게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준비해 놓고 나니 액수가 좀 적습니다만, 이 돈은 여러분이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러니 이 어렵게 번 돈을 좋은 일에 보다 값지게 나누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손으로 직접 베풀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성금이나 선물을 전할 때 정성을 담은 메시지도 적어서 함께 드리라고 예쁜 카드도 한 장 넣었습니다. 돈보다 더 값진 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봉투를 열어 본 회사 직원들은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봤지만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이 봉투가 가장 가치 있게 쓰일 곳’을 찾아보라는 구절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난 여름 폭우로 가족과 집을 잃은 분들, 무심하게 봐 넘긴 소년소녀 가장, 날씨가 추워져도 찾아올 이 없이 쪽방을 지키며 사는 홀로 사는 노인…. 이렇듯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데 나를 돌아보니 좀 부끄럽다.![]()
고백건대, 나는 얼음장 같은 지하도 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장애인에게 동전 한 닢 보탠 적이 없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누가 껌 한 통 팔아 달라고 내 무릎 위에 놓았을 때 그 껌값 1천원을 편한 얼굴로 내밀지 못한 것도, 길거리 빨간 자선냄비에 다가가기 어려웠던 것도 모두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렇듯 내 마음에 행동이 따라 주지 못한 것은 ‘남을 도와주는 연습’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와 회사 동료들은 “우리 사장님은 연말에라도 이런 ‘연습’을 ‘가볍게’ 한 번씩 실천해 보자는 뜻을 이 봉투에 담아 나눠주신 것 같다”고 받아들였다.
우리 회사는 연말연시에 신문이나 방송에 회사 이름을 내면서 기탁하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은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돈벌이에만 몰두하고 이웃에 대해 무심한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직원들을 통해 회사 형편에 맞춰 가며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잔잔하고 따뜻하게 ‘이웃사랑 실천’을 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받은 ‘봉투’를 가장 보람 있게 쓰려고 이리저리 고민해 봤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길거리 자선냄비에 그냥 넣어 버리기엔 너무 무성의한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돈을 값지게 사용할 일이 생겼다. 어제 저녁 퇴근하다가 우리 회사에서 주차관리하시는 할아버지가 이 혹한에 좀 부실해 보이는 점퍼를 입고 떨면서 일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내 돈을 좀 보태더라도 두꺼운 점퍼를 한벌 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퍼를 곱게 포장해서 직접 전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옷과 함께 카드에 평소 고마운 마음을 간단하게 적어서 주차관리실에 몰래 갖다 놓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다. 평소 안 하던 일을 하려니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럽다. 이래서 좋은 일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회사 동료들은 ‘봉투’와 관련해서는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업무에 바쁜 가운데서도 저마다 알차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봉투’ 하나를 끌어안고 흐뭇한 상상을 하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지금 주차관리하시는 할아버지가 이번 겨울을 보다 따뜻하게 보낼 상상에 내 마음이 먼저 푸근해진다.
글·이현경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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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