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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제24호>“모든 길은 곧 집이다”

[SET_IMAGE]1,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이 가을에 문득 생각하니, 길이 곧 집이었다. 집 밖에 그 어디론가 향하는 길이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모든 길이 곧 집이었다. 집과 길은 자웅동체의 한몸이었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게 바로 길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승의 나그네이기에 발바닥 밑이 모두 안방 구들장이요, 잘 모르는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 그늘도 바로 집이요, 숲 속의 잘 모르는 무덤도 집이다. 나그네는 가야 할 길이 따로 없고, 다만 이 세상 어디에나 늘 도착하는 집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그네는 함부로 자살하지 않는다.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집은 무엇인가. 일평생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죽어 두 평의 집, 무덤 하나 가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집과 무덤으로 곧바로 향하는 무한질주의 행로 속에 과정으로서의 길은 적당히 생략되어도 좋은가. 그것이 인생인가. 과정으로서의 길을 생략하고, 길이 집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집착과 욕망으로서의 집만 존재할 때 오히려 우리는 자주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잃은 길도 길이요, 좌불안석의 집도 집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더더욱 혼돈의 길이 아닌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과와 목표만을 추구하며 살다 보면 그 화사해 보이던 결과의 꽃마저 바로 죽음의 조화일 뿐이다. 하여 이 가을에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것 아닌가. 벌초와 성묘는 감사와 반성과 참회의 한 양식이다. 이 세상을 물려준 조상에 대한 감사의 큰절이자 무언가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참회요, 새로운 다짐의 소중한 의식이다. 바로 여기에 인생살이의 핵심이 있다. 살다 보면 너무나 힘들고 앞길이 캄캄할 때 우리는 소중했던 이들의 무덤을 찾아간다.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힘들 때는 무덤을 찾지 않는다. 왜 그럴까. 평상시에는 정신없이 잊고 살다 집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인생, 그 과정의 실체를 바로 보는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소중했던 이들이 행여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자기 성찰, 이것이 오히려 삶을 풍성하게 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가을의 나그네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문득 삶이 팍팍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하거나 외롭거나 절망적일 때 가장 가까운 누군가의 무덤을 찾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친족이나 친구가 아닌 잘 모르는 이의 무덤이라도 좋다.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다 무슨 사연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잘 모르는 이의 무덤 앞에 소주라도 한 잔 올리고 큰절을 해보라.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에게 고해의 상담을 해 보라. 우리가 죽어 마침내 무덤을 집으로 삼을 때 후세들에게 물려줄 ‘21세기 타임캡슐’은 지구를 덮어가는 쓰레기 매립장이나 무덤뿐만이 아니다. 바로 집과 무덤 사이의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길이다. 그대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하나 둘 찍고 있는 발자국들의 화석,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타임캡슐이자 희망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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