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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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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연한 봄이다. 나무들 중 가장 늦게 싹을 틔우는 배롱나무가 연초록 옷을 갈아입었으니….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이 배롱나무는 올봄의 지각생이다.

어느새 다른 나무들은 봄꽃을 털어내고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자운영이 보랏빛 꽃구름을 일으키며 온 들녘에 자욱하고, 찔레며 벽오동이며 아카시아마저 환하게 꽃을 피우는데, 백일홍은 이제서야 긴 겨울잠의 눈곱을 떼어내며 막 ‘봄의 교문’을 헐레벌떡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때, 수꿩이 울었다. 춘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수꿩들이 산중의 망중한을 시기라도 하듯 느닷없이 ‘꿔엉 꿩’, 푸드득 날아올랐다. 마치 누군가 꿩을 보고 새가 아니라고 우기기라도 하듯, 아니 마치 제 이름이라도 잊은 듯 울어도 꼭 ‘꿔엉, 꿩’ 이렇게 우는 것이다.

언뜻 그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머리가 나쁜 꿩들이 ‘끄응 끙’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오죽하면 머리가 나쁘거나 기억력이 없는 이들을 보고 ‘새대가리’라고 부르며 놀렸을까? 아니 새대가리보다 닭대가리 혹은 꿩대가리라고 놀리는 것이 훨씬 더 치명적일 것이다.

야생동물들의 사전에 비만이란 없지만, 새들 중에서도 꿩은 비교적 비만에 가깝다. 사실은 다 자란 수꿩의 몸무게 편차가 채 100g도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만증후군의 혐의마저 완전히 벗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꿩은 다른 새들과 달리 날아오르려면 활주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겨울 철새인 청둥오리가 물 위를 한참 동안이나 달리다 수상비행기처럼 간신히 날아오르듯 꿩 또한 논밭을 한참이나 달리다 겨우 직선 비행으로 날아오른다.

외모로만 본다면 수꿩은 그야말로 황제 같지만, 사실 꿩들은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벌렁벌렁 겁이 많은 ‘새가슴’이다. 누군가 큰 소리를 지르거나 앞산의 돌만 굴러도 꿩들은 뛰지도 날지도 못하고 두리번거린다. 사태를 파악한 후에야 후다닥 뛰다 간신히 날아오르지만, 정 다급하면 날갯죽지 깊숙이 고개를 처박고 나 몰라라 한다. 제 눈에만 안 보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꿩은 빠르다. 머리가 좀 나쁘다고 자존심마저 없으랴. 냅다 뛰다 미친 듯 날아오르다 이따금 산그늘에 가려진 전깃줄에 목이 꺾이거나 날개가 꺾이기도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곡선 비행에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한순간에 전깃줄을 피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꿩은 추락하면서 생각할 것이다. ‘내 탓이 아니다. 나를 놀라게 한 이들의 탓이지, 어찌 나의 탓인가’ 반문하고 또 반문하며 추락하는 샤브샤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꿩은 죽으면서까지 순결성을 잃지 않는다. 정면의 비만이요, 정면의 날개인 것이다.

봄날의 춘정을 이기지 못한 수꿩이 운다. ‘꿔엉 꿩-’ 제 이름을 부르듯, 마치 주문을 외듯 ‘나는 꿩이야, 나는 꿩!’ 수꿩이 운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온통 생의 비만인 우리도 시시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보아야 한다. 과잉 섭취의 비만, 정보 홍수의 비만, 속도의 비만, 천민자본주의식 욕망의 비만, 비인간화의 비만을 반성하며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인가 되물어야 한다.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시시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침내 머리가 나빠지다 못해 단순해지도록 저 봄날의 수꿩처럼 제 이름을 주문처럼 부르고 또 불러 보아야 한다. 욕망과 무한질주의 산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전깃줄에 어느 순간 목이 꺾이거나 날개가 꺾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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