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 생명평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노라면 참으로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정치는 정치대로 그러하고 종교·경제·사회·문화·환경 등 그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그 어디에서 그 누구를 만나도 하나같이 살기 힘들다고 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우니 나 또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무지 행복이란 '물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답답하다. 인생은 고해(苦海)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선재동자처럼 헤매지만 우리 시대의 선지식과 청학동은 고사하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이들만 마주치게 되니 행복한 '자족(自足)의 삶'은 이상일 뿐인가? 범우주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해악적인 존재다. 석가와 예수, 공자와 노자 등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또 따르지만 갈수록 세상은 더 나빠지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행복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노래할 것인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라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처참한 심정으로 걷고 또 걸었다. 서로 나누고 서로 모시는 세상을 꿈꾸며 만나고 또 만났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욕망이었다. 모두 브레이크가 고장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브레이크인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브레이크는 곧 죽음이라고 믿고 있었다. 무한질주의 욕망이라는 전차에 타지 못해 아우성이고, 그 전차에서 내리는 것은 곧 패배와 불행이라고 믿고 있었다. 잘못된 길을 버리거나 지우며 새로운 길을 가려 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도 불행하고, 부자도 불행하다고 했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경제가 어려워 죽겠다고 했다. 모두 더 갖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청빈(淸貧)과 청부(淸富)의 삶은 우주 밖의 얘기였다. 얼마나 더 가지면 행복할까? 모두 죽이고 저 혼자 우주를 다 가지면 그때는 행복할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만 분명히 이해한다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모두 더 가지려고 몸부림치다 싸우고, 급기야 전쟁을 일으키는 불행에 자초하니 답은 분명하다. 자족의 삶이다. 절대적인 가난을 이길 장사는 없지만, 대개는 '자발적 가난'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 불행에 급브레이크가 잡히고 행복으로 유턴할 수 있다. 21세기 행복으로의 초대는 자발적 가난뿐이다. 덜 가진 자는 덜 가진 대로 자족하며 나눌 줄 알고, 더 가진 자 또한 자족하며 나눌 줄 아는 청빈과 청부의 삶이 곧 행복의 보증수표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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