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좋아하는 소설가를 물으면 주저 없이 ‘박형서’를 말한다. 위키백과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지적 담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순정한 허구 세계를 창조한다든지, 묵시록적 상상력을 광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로 확장한다든지 하는 유식한 말이 나오는데, 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다. 내가 박형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쓰는 문장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여타의 소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앗!” 하며 가슴을 부여잡게 하는 결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박형서를 흠모한 나머지 그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편입하려 모집요강을 살펴본 적도 있으나 지적 능력의 한계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입시제도가 그와의 만남을 저지했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작가를 가장 가까이 만나는 방법은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덕이다. 나는 그간 출간된 그의 책을 모두 읽었다. 어떤 소설은 두고두고 필사할 만큼 인상 깊었지만 또 어떤 소설은 너무 난해해 읽는 둥 마는 둥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콩깍지가 벗겨지지는 않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면 왠지 더 멋있어 보이는 법. 얼마 전 출간된 그의 장편소설 ‘죽도록 맞으며 살아왔다’를 주문할 때는 책 소개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오래간만에 소설을 들고 나타난 그를 어서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책을 받아든 나는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려 648쪽에 이르는 ‘벽돌책’이었다.
저기, 제가 박형서 씨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만나서 수다나 떨고 싶은 정도지 몇 박 며칠에 걸쳐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야깃거리를 한 보따리 싸들고 오시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 제가 요즘 좀 바쁘기도 해서…. 아니, 가시라는 건 아니고요. 하, 일단 거기 좀 계실래요? 그렇게 머리맡에 책을 둔 채 며칠을 보내다가 추석 연휴를 맞았다. 좋다고 쫓아다니던 박형서를 외면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연휴 동안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해서 큰맘 먹고 책장을 펼쳤다. 그렇게 몇 장쯤 종이를 넘기다가 이 책이 이다지도 두꺼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하게 됐다. 소설은 ‘박복대’라는 인물의 일생을 따라가며 광복 직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었다. 대하소설로도 모자랄 이야기를 648쪽에 담았으니 박형서는 가히 요약의 천재였다.
주인공 박복대는 때려주고 싶게 생긴 얼굴의 소유자다. 그 탓에 깡패, 시민, 애인은 물론 곰에게도 맞았다.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으로도 모자라 국군에게까지 맞았다.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민주화 항쟁 현장에서 맞은 것도 모자라 기력이 쇠한 사람이 모인 노인복지관에서마저 구타를 당했다. 바보 같은 박복대는 자신을 때린 애인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으나 아이는 낳지 않았다. 그 아이가 자라 자신을 때릴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보통의 사람이 그 정도로 맞았다면 진작에 세상을 하직했을 테지만 박복대는 장수했다. 그가 죽도록 맞으면서도 죽지 않은 비결은 맞아도 맞아도 회복하는 기이한 능력을 지닌 덕이었다. 박복대에게는 그 능력이 저주였을지 몰라도 독자인 나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온갖 수난을 겪으며 살아온 수많은 한국인의 삶을 박복대 한 사람을 통해 톺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회복과 통증은 별개의 문제였다. 다친 몸이 말끔하게 치유된다 하더라도 맞을 때 아프지 않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마음의 상처는 쉬이 회복되지 않아 박복대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에게 앙갚음할 법도 하건만 박복대는 일평생 남을 때리지 않았다. 맞는 일이 싫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자신이 남을 때리면 그이가 싫어할 것이 분명해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것이다. 구타에 이골이 난 박복대는 산속으로 숨어들기도 하지만 이내 사람 사이로 돌아온다. ‘박복대는 인생이 한 번뿐이라서 외롭고 허망한 대신, 한 번뿐이라서 끔찍이 소중했다. 따귀를 거하게 맞아 얼굴이 휙 꺾이면 박복대는 돌아간 눈에 새로 담긴 그쪽 세상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곤 했다.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도 코딱지만 한 행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박복대의 시선은 모진 시대를 살아낸 우리 모두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맞고 또 맞고 거듭해서 맞는 이야기라 읽는 내내 기분이 칙칙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금물이다. 박형서 특유의 유머 덕에 울다가도 웃을 수밖에 없으니 엉덩이에 난 털을 처리할 방법만 걱정하면 되겠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나흘 만에 마지막 장에 이른 나는 “아앗!”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박복대 생각이 자꾸만 났다. 며칠 사이에 박복대에게 함빡 정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소설 속 인물과 진하게 교감해보고 싶다면, 벽돌책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 이 책에 도전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지금 당장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일단 소장해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도 방법이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당신을 때리려 할 때 튼튼한 방패가 돼주는 것은 물론이요, 요즘 사람들은 통 책을 읽지 않는다는 비난을 막아내는 든든한 방패 역시 돼줄 테니 말이다.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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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