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건전재정은 오랫동안 구호에 가까웠다. 지출을 줄이고 적자를 낮추며 국가채무를 관리하자는 말은 반복됐지만 저성장과 고령화, 복지지출 확대, 위기 대응이 겹치면서 국가채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꾸준히 올랐다. 채무의 절대액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어려운 현실에서 재정건전성의 핵심은 결국 분자인 채무와 분모인 명목 GDP가 어느 속도로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그 분모가 빠르게 커지는 드문 국면에 들어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명목 GDP는 전년 동기보다 17.1% 늘었고 전기 대비로도 10.5% 증가했다. 전기 대비 기준으로 1976년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실질 성장뿐 아니라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가격 상승과 교역조건 개선이 GDP 디플레이터를 끌어올린 결과다.
2026년 예산상 국가채무(D1)는 1415조 원, 정부가 전제한 국가채무비율은 51.6%다. 이 비율이 가정하는 올해 명목 GDP는 약 2743조 원이다. 지난해 연간 명목 GDP가 2663조 원이었다는 점을 기준으로 올해 연간 명목 GDP가 10%만 늘어도 경제 규모는 약 2930조 원에 이른다. 국가채무가 예산대로 1415조 원까지 증가한다고 가정해도 단순 계산한 채무비율은 48.3%가 된다. 정부의 예산상 전망보다 3.3%p 낮고 지난해 중앙정부 국가채무비율 47.6%보다 불과 0.7%p 높은 수준이다.
이것이 경제 성장의 힘이다. 국가채무의 절대액은 분명 중요하다. 이자비용과 차환 부담, 미래 세대의 재정 여력을 고려하면 채무가 늘어도 비율만 낮으면 된다는 식의 안일함은 위험하기는 하다. 하지만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할 때 절대액만 보고 적극적 재정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무시하는 것도 오류다. 기업의 부채를 평가할 때 매출과 현금 흐름을 함께 보듯, 국가의 채무도 국민경제의 소득과 과세 기반 속에서 봐야 한다. 경제 규모와 소득이 빠르게 늘면 같은 채무의 무게도 달라진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명목성장이 단순한 물가 상승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분기 실질 GDP도 전년 동기 대비 3.8% 성장했고 실질 국민총소득은 13% 늘었다. 생산과 함께 대외거래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증가했다는 뜻이다. 반도체 수출 호황이 기업 이익, 설비투자, 임금, 법인세와 부가가치세로 이어진다면 재정의 분자와 분모 사이의 관계는 더욱 개선될 수 있다. 세수의 기반이 넓어지면 적자를 메우기 위해 추가 차입에 의존할 필요도 줄어든다.
숫자로만 건전재정을 평가해선 안 된다
그동안 건전재정은 국가의 빚을 줄이기 위해 지출을 억제하고 국채 발행을 줄이는 숫자 목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건전성은 필요한 지출을 무조건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성장률을 높이고, 세입 기반을 넓히며, 지출의 질을 개선해 미래의 부담을 줄이는 데 있다. 연구개발, 인공지능, 전력망, 기후 적응, 돌봄, 교육과 직업 전환에 대한 투자는 당장의 재정지출이지만 미래의 생산성과 세수를 키우는 투자이기도 하다. 재정의 숫자는 지출계획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성장 경로와 세입 여건에 의해 함께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 정부에서 재정건전성이라는 명목으로 재정의 역할을 소극적으로 인식하고 근거 없이 재정을 줄여왔다. 겉으로 재정건전성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세수 전망을 과도하게 하고 마치 국채 발행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포장했었다. 그 과정에서 연구개발비가 아무 근거 없이 큰 폭으로 삭감되기도 했다. 이때 생긴 연구계의 상처는 가뭄을 겪을 때 생긴 나무의 나이테처럼 평생 우리 연구계를 괴롭힐 것이다.
과장된 세수 예측은 세입 부족을 가져왔다. 국가채무비율을 유지하려고만 하니 정부는 국가 채무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은행으로부터 대규모 차입을 했다. 이걸로도 안 되니 대규모 불용 사태를 가져왔다. 정부 지출이 줄어드니 가뜩이나 힘든 경제를 재정이 끌고 내려가는 악순환이 지속됐다. 우리 경제성장률은 1% 내외로 곤두박질쳤다. 결과적으로 건전재정은 건전하지도, 재정의 역할도 하지 못한 구호에 그쳤다.
건전재정은 무조건적인 긴축이 아니다
이제 정책 논의도 채무가 늘었으니 실패, 비율이 낮으니 성공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채무 증가분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그 지출이 민간투자와 고용, 생산성, 세입으로 얼마나 돌아오는지를 따져야 한다. 소비성·관행성 지출을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고 사회적 수익률이 높은 투자에 재원을 옮기는 구조조정은 필요하다. 호남에 건설할 제2의 반도체 클러스터 같은 과감한 투자를 재정이 선도해야 한다.
호황의 과실을 모두 영구지출로 고정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가격과 교역조건의 개선은 경기 순환의 성격도 강하다. 일시적으로 늘어난 세수는 채무상환과 재정 완충장치 확충, 장기 투자 사이에 균형 있게 배분해야 한다. 특히 의무지출의 증가 경로를 점검하고, 효과가 낮은 사업은 구조조정하며, 새 지출에는 성과와 일몰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건전재정은 긴축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좋은 시기에는 미래를 준비하고 나쁜 시기에는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재정운용의 원칙이다.
명목 GDP 두 자릿수 성장은 국가채무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성장률이 둔화하면 비율은 다시 빠르게 악화할 수 있고, 세수 증가가 자산시장 과열이나 일부 산업의 초과이익에만 머문다면 지속성도 약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변화는 분명하다. 이재명정부에서는 오랫동안 말로만 외쳤던 건전재정이 지출 삭감의 구호가 아니라 성장과 세입 기반 확충을 통해 실현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 같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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