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삼각김밥 먹으며 ‘영숙 할매’를 생각하다

엄살 부리고 싶지 않지만 전에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의자에 앉아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길을 걸으며 삼각김밥에 닭가슴살을 먹는 요즘이다. 삼각김밥을 급하게 씹어 넘기다가 목이 막혀 가슴을 치던 어느 날에는 마이클 잭슨이 생각났다. 가수 중에 제일 바쁜 사람은 마이클 잭슨 아니었을까. 그가 아무리 바빴다 한들 나처럼 끼니를 때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그는 음악계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남겼지만 나는 출판계의 나부랭이일 뿐이지 않은가. 어찌 됐든 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일상을 하나씩 포기했다. 샴푸까지만 하고 트리트먼트는 포기, 미용실 가서 머리 자르기 포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은희경의 신작소설 읽는 것도 포기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책 읽기를 포기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과연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가, 다른 것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이 직업을 포기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 ‘우리 집 작은 개가 할매를 물었을 때’라는 그림책을 발견했다.
‘칠십이 넘은 개가 팔십이 넘은 사람을 물었다’라는 첫 문장도,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성인이 그린 것 같기도 한 생경한 그림체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특이했던 건 표지에 적힌 지은이의 이름이었다. ‘글·그림 현아, 시·그림 영숙.’ 책 한 권에 글과 시, 그림이 동시에 담겨 있다니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구성돼 있는 것일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책장을 서둘러 넘겨 보았다.
현아는 독일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는 영숙의 외손녀다. 영숙이 개에게 물려 입원했을 무렵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한 현아가 그녀의 간병을 도맡는다. 좁은 병실에 갇혀 지내던 두 사람은 수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현아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 영숙에게 그림을 그려 볼 것을 권한다.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이야기만큼이나 영숙의 그림 역시 종잡을 수 없다. 머리는 고양이인데 몸은 생선인 생명체라든지, 눈이 세 개인 걸로도 모자라 웃통을 훌렁 벗은 영숙의 자화상에서는 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림에 덧붙은 영숙의 시도 그와 결을 같이함은 물론이다. 영숙의 그림을 살펴보던 현아는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른다. 현아는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싶어진다고 말이다.
지금이야 영숙을 사랑하게 된 현아지만 어린 시절의 현아는 영숙을 무서워했다. 영숙의 말투는 거칠었고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숙은 늘 바쁘게 움직였기에 현아의 머릿속에는 그녀와의 추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영숙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영숙은 태몽부터 범상치 않았다. 산신령이 영숙의 엄마에게 녹슨 도끼를 주며 잘 갈면 쓸데가 많다고 말했다는 것이 아닌가. 영숙의 엄마는 산신령의 말대로 딸내미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밥, 빨래, 청소, 물 길어오기는 물론 동생들을 키우는 것마저 영숙의 몫이었다. 결혼한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영숙은 돈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대신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통근버스를 타려고 뛰어가다가 꼬꾸라져 턱이 깨지고, 아침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재봉틀을 돌리다가 쓰러지면서도 영숙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녹록지 않은 삶이지만 영숙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구는 대신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데 집중한다. 남자가 꼬이니 세수는 하루에 한 번만 하라는 의붓아버지의 말을 무시한 채 꼭 두 번을 씻었고, 재봉틀공장 사장이 임금을 주지 않고 잠적하면 노동청에 전화해서 밀린 임금을 받아냈다.
영숙의 당찬 면모는 공장에서 벌였던 몸싸움 일화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영숙은 몇몇 사람이 수다 떠는 모습을 아무런 생각 없이 지켜보다가 덩치 큰 여자에게 공격을 당한다.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에서였다. “막 얻어터지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는 기라. 내 손에 가위가 있었거든. ‘이걸로 푹 찔러 버려?’ 근데 동시에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영숙아,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젖을 확 물어 버렸지. 나중에 그 사람이 왜 남의 젖을 물었냐고 물어보데. 밑에 깔린 사람이 어디를 물겠는교?”
책장을 덮을 때쯤 나 역시 현아처럼 영숙을 사랑하게 되었다. 요즘 말로 ‘걸크러시’를 제대로 당하고야 만 것이다. 앞서 현아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소개한 이유다.
영숙이 나의 할머니가 아닌 탓에 책장을 덮음과 동시에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됐지만 그녀가 전해준 태도만큼은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는 듯하다. ‘전주비빔? 참치마요? 대게딱지장은 짜기만 하고 별맛도 없는데. 진짜 질린다, 질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을까. 그 유명한 마이클 잭슨도…’까지 구시렁대다가 생각을 고쳐먹은 걸 보면 말이다. 나는 나를 흠씬 두들겨 패는 현실에 더는 굴하지 않기로 했다. 바쁜 사람이 삼각김밥이라도 먹어야지 뭐를 먹겠는교?
이주윤
여러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됐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문해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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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