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전 세계 박물관이 살아있다

배우 벤 스틸러가 주연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박물관은 밤이 되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한다. 전 세계에서 약 1조 8000억 원을 벌어들인 이 초대형 블록버스터 속 유물들은 밤마다 생명을 얻어 고요한 공간을 휘젓는다. 거대한 공룡의 꼬리뼈가 강아지처럼 흔들며 애교를 부리고, 모아이 석상은 껌을 달라고 떼를 쓰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말에 탄 채 박물관 복도를 누빈다.
현실의 박물관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다. 두꺼운 유리 진열장 너머의 유물은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단정하게 멈춰 서 있다. 냉방장치가 팽팽 돌아가는 엄숙한 정적 속에서 박물관은 관객에게 침묵과 관조만을 강요한다. 손을 대서도, 소리를 내서도 안 되는 그곳은 오직 과거의 유산이 유폐된 박제실에 가깝다. 박물관이 오랫동안 ‘유물의 무덤’이나 ‘죽은 공간’이라는 차가운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이유다.
그러나 유물(遺物)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짚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유’는 남길 유(遺) 자를 쓴다. 세월이 지나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물건이라는 수동적이고 과거 지향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이 수동적인 존재들이 2000년대 이후 특히 디지털 매체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유희를 만나면서 박물관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진열장이라는 단단한 벽을 깨고 나와 모던(modern·현대)의 삶과 직접 호흡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거대한 패러디와 재해석의 물결이 폭발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온 세계가 팬데믹으로 멈춰 섰던 때였다. 문을 닫은 미술관과 집 안에 갇힌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먼저 신선한 시도가 시작됐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두 시민이 시작한 누리소통망(SNS) 계정 ‘투센 쿤스트 엔 콰란테네(Tussen Kunst & Quarantaine·예술과 격리 사이)’ 운동이 시작점이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집에 있는 물건 최소 세 가지를 활용해 명화를 재현할 것.’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국립미술관 소장품들이 순식간에 유쾌한 놀잇감으로 변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걸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사람 얼굴 대신 옥수수 한 자루가 들어앉았다. 머리에는 비닐봉지를 둘러 터번을 만들고 진짜 진주 대신 단추를 달아 이 명화를 재현했다. 얀 아셀린의 ‘위협받는 백조(The Threatened Swan)’는 흰 세탁물 세례와 휴지 폭탄으로 재현되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병원에서 격리근무를 하던 의료진이 방호복을 입고 회의하는 모습을 연출해 세계인에게 깊은 울림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했다. 마늘·휴지·수건 같은 보잘것없는 일상 소품으로 거장의 작품을 위트 있게 재해석하자 세계시민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미술관(Getty Museum)도 이 유쾌한 바람에 동참했다. 게티미술관은 ‘집에 있는 물건 세 가지만으로 명화를 재현하라’는 제안을 공식 SNS를 통해 건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가족은 고흐의 걸작 ‘붓꽃(Irises)’을 고르더니 찰흙과 당근 조각, 나무구슬을 거실 바닥에 배열해 화폭을 완성했다. 두루마리 휴지를 겹겹이 겹쳐 르네상스 초상화 속 셔츠의 주름깃(Ruff collar)을 만들고,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품에 안은 채 고전 초상화의 귀족을 흉내 낸 사진들이 전 세계를 도배했다.
해외 사례가 주로 명화 속 인물의 포즈나 구도를 흉내 내는 정적인 패러디에 그쳤다면 한국의 관객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동적 감상을 넘어 스스로 유물 그 자체가 되어 온몸으로 살아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는 연극 무대로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유물 분장놀이 최종 결선 무대는 그야말로 박물관이 ‘살아있는 연극 무대’로 탈바꿈한 현장이었다. 수천 년 동안 정지해 있던 유물들이 사람의 몸을 빌려 무대 위를 걷기 시작했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육중한 돌의 질감을 털어내고 걸어 다니고, 신라 금귀걸이가 사람의 귀에 걸려 화려하게 찰랑거렸으며, 고려청자는 특유의 유려한 곡선을 온몸으로 살린 채 무대를 누볐다.
이 대회의 대상은 통통 튀는 잉어의 모습을 유쾌하게 재현한 ‘백자 잉어모양 연적’ 패러디 참가자에게 돌아갔다. 잉어로 변신한 참가자는 온몸을 던져 바닥을 구르며 잉어의 생동감을 생생하게 연출했다. 이 광경을 본 네티즌들은 부유한 집안을 뜻하는 ‘금수저’ 대신, 유물을 재현하기 위해 단련된 몸을 던졌다며 ‘근(筋)수저’라는 환호 섞인 별명을 붙여주었다.
유물은 본래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 있던 일상의 물건이었다. 백자 연적은 문인의 책상 위에서 먹을 갈던 도구였고, 금귀걸이는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빛내주던 장신구였으며, 고려청자는 술과 물을 담아 나누던 삶의 용기였다. 그러나 박물관이라는 진열장 안에 들어가는 순간, 이 물건들은 삶의 맥락에서 단절돼 ‘죽은 유물’이 됐다.
박물관을 살려내는 것은 거창한 학술 연구나 비싼 보존처리 기술만이 아니다. 바로 사람의 온기와 현대적 해석이다. 현대의 관객이 유물을 바라만 보는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그 유물을 소재로 웃고, 흉내 내고, 놀고, 이야기를 나눌 때 수천 년 전의 유물은 비로소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걸어나온다.
영화 속 주문처럼 박물관을 살려내는 진짜 마법은 밤사이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낮 시간 박물관을 채우는 관객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거침없는 상상력이다. 관객이 유물과 함께 호흡하고 놀 때 세계의 박물관은 살아있다.
어수웅
조선일보에서 문학, 영화, books 등 문화부 기자를 오래했다. 지은 책으로 ‘탐독’ ‘파워 클래식’ 등이 있다. 주말뉴스부장, 문화부장, 여론독자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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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