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1

 

지난 11월 3일 이종완(41) 피규어 아티스트의 분당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영화 <에일리언 2>에 나오는 ‘에일리언 퀸’ 피규어였다. 쩍 벌린 입과 치켜든 두 손이 위압적이었다. 피규어는 영화·만화·게임 등의 등장인물을 소재로 한 인형으로 관절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장난감이다. 에일리언 퀸 피규어는 이 씨가 소속돼 있는 사이드쇼에서 만든 제품이다. 사이드쇼는 가장 오래된 피규어 제작 전문업체로, 스마트폰업계로 말하면 애플이나 삼성 같은 기업이다.

이 씨는 올해 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이드쇼 정규직원이 됐다.

전문가 뛰어넘을 자신만의 무기 만들어라

이 씨가 피규어에 빠지게 된 건 2003년 카이스트 교직원으로 근무할 때다. 당시 참관했던 ‘옵티컬 파이버 컨퍼런스’에서 <반지의 제왕> ‘나즈굴’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방금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생생한 모습이 이 씨를 사로잡았다. 이 제품을 만든 곳이 다름 아닌 사이드쇼였다. ‘반지의 제왕 나즈굴’을 30만원에 구매해 집으로 들고 온 이 씨는 언젠가 피규어 제작을 직업으로 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피규어와의 인연은 취미로 발전했다. “사이드쇼에서 만든 피규어를 사서 모으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부족한 부분이 보였습니다.” 이 씨는 양산품을 사서 직접 색을 입히는 작업을 했다. 피규어 제작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렸다.

2

이 씨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무작정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어렵게 알게 된 제작 테크닉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 씨는 그들을 뛰어넘고 싶었다. “이미 피규어 제작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분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저만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규어에 머리카락을 심기 시작했죠.” 그는 세계에서 털을 가장 잘 심는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털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인터넷을 뒤져 털이란 털은 모두 사 피규어에 심어봤다. 그중 가장 자연스러운 머리털을 연출할 수 있는 게 양모였다. “머리카락을 심는 방법은 피규어의 두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도 머리 형태가 다 다르듯이 피규어도 마찬가지죠.” 일반적으로 성인남자의 엄지손가락 만한 두상에 머리카락을 심는 데 8시간이 걸린다. 일하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을 피규어 만드는 데 할애했다. 이 씨는 이렇게 만든 피규어 사진을 찍어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외국에서 제 블로그를 볼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이드쇼에서 제가 만든 피규어를 보고 연락이 오길 바랐습니다. 저는 사이드쇼에서 팀을 꾸려 제가 만들고 싶은 피규어를 만드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이드쇼에 채용 요청을 하면 사이드쇼에서 바라는 제품만 제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홍콩 토이월드와 미국 OSW 등 해외 유명 피규어 사이트에도 글을 올렸다. 이 씨를 먼저 알아본 곳은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유명한 미국 만화회사 DC코믹스다. 그는 DC코믹스를 사이드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이 씨는 2007년 DC코믹스에서 제품 한 개에 60만원을 받고 일하면서 전업 피규어 아티스트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2년 2월 드디어 사이드쇼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이 씨는 사이드쇼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교육대학원에 다니며 교생실습을 받고 있었다. “솔직히 미래가 불안했다”고 그는 말했다. 사이드쇼에서는 DC코믹스보다 대우가 좋지 않았지만,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씨는 단순히 피규어를 제작하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피규어를 잘 만들기 위한 제안서를 작성해 본사에 제출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동양은 눈으로, 서양은 입으로 하죠. 그래서 본사에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피규어의 눈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처음부터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이 씨는 본사가 있는 미국으로 직접 가 아트디렉터를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 결과 본사에서는 이 씨에게 직접 아시아를 공략할 제품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씨는 한국인 5명으로 이뤄진 팀을 책임지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됐다.

미술 실력보다 피규어를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

그는 장난감을 좋아하면 누구나 피규어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남다른 미적 감각이나 뛰어난 미술 실력보다 피규어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좋아하는 걸 하더라도 언젠간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런 그에게는 다음 목표가 있다. 미술을 전공한 학생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 피규어를 만드는 것이다. “제 주변에는 조소과를 졸업하고 취업이 어려워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들의 실력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들에게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글·정혜선 기자 2014.11.10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