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털이 달린 다리가 턱턱 땅을 내딛고 꿈지럭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소매 안에서 털이 삐죽 솟는 기분이다. 거미의 존재는 친근해지기 어려웠다.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독거미 ‘타란툴라’의 이미지처럼 강렬하다. 거미공포증을 일컫는 말인 ‘아라크노포비아(그리스신화 <아라크네>에서 따온 말)’도 있을 정도다.
그러다 거미는 ‘스파이더 맨’으로 돌연 영웅이 되어 시리즈 판으로 확대됐다. ‘거미박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떠올린 이미지도 현대판 스‘ 파이더 맨’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빠의 직업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딸들은 제가 거미 채집을 위해 잠자리채와 비슷한 도구(sweeping net)를 든 채 출장 다니는 모습을 보고 동네 친구들에게 벌레랑 해충 잡는 ‘세스코’사를 다닌다고 말했다더군요.”
유정선(46)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전시교육과장은 우리나라에 단 3명뿐인 ‘거미박사’ 중 1명이다. 동국대에서 동물계통분류학을 전공하면서 거미세계에 입문했다. 2007년 8월부터는 국가 생물자원을 발굴·확보·소장·연구하는 생물자원관에서 환경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
국내에 단 3명뿐인 ‘거미박사’ 중 1명
11월 12일 수장고로 안내한 그는 2만6천여 점을 보관한 거미 유리병들을 보여주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예쁘고 신기한 거미들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혐오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쯤 되면 어린 시절이 궁금해진다. ‘유정선 과장이 스파이더맨처럼 박물관에 갔다가 거미에게 쏘였다든지, 거미와 관련된 특이한 경험은 없었을까’라는 상상. 그의 대답은 실망스러울 만큼 싱거웠다. “사실 거미나 다른 곤충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거미가 징그럽거나 무서운 적도 없었고요.”
거미와의 인연은 이랬다. 그의 작은아버지가 유 과장의 스승인 동국대 김주필 교수와 서울대 동물학과 동기인 인연으로 유 과장에게 거미 연구를 추천했다(김주필 교수는 1985년부터 국내에서 유일한 ‘한국거미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학술적으로 거미는 약 4만5천여 종이 보고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700여 종 이상 거미의 존재가 밝혀졌다. 유 과장은 늑대거미를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를 사로잡은 늑대거미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늑대거미는 거미줄로 먹이를 포식하지 않고 사냥을 해 먹이를 잡습니다. 진화연구에서는 매우 중요하고요. 이름도 남성답게 늑대거미라는 것이 맘에 들지 않나요?”
거미는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산업적 가치를 주목받고 있다. 거미의 생태계적 의미에 대해 묻자 거미박사답게 청산유수다. “진화 연구에서는 아주 훌륭한 대상입니다. 일단 거미는 남극을 제외한 지구 대부분의 대륙에서 대기와 바다를 제외한 폭넓은 서식지를 갖고 있습니다. 1억3천만년 전부터 다양한 환경에 잘 적응해 살고 있는 동물입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사소한 거미라도 아주 유서 깊은 가문의 자손들이라는 겁니다.”
그는 덧붙여 거미가 ‘이로운 동물’임을 강조했다. “거미는 벼멸구, 매미충, 모기 등 해충을 잡아먹어 유기농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천적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특히 논에 서식하는 약 200여 종의 논거미는 육식성으로 다수의 해충을 처리하는 생‘ 물농약’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거미줄·거미독 등 버릴 게 없는 ‘생물자원’
최고의 생물자원으로는 거미줄을 꼽았다. 자연섬유인 거미줄은 강철 강도의 약 5배이고 고무밴드보다 탄력성이 우수하다고 한다. “거미줄은 수백만의 개별 단백질 분자가 서로 꼬여 엄청난 내구성을 지닙니다.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강도가 20배 큽니다. 1센티미터의 두께로 뭉친 거미줄은 점보제트기도 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인체 면역거부 반응도 없고 생분해성으로 환경오염의 염려도 없습니다. 방탄소재, 의류, 의료 분야에서 향후 인간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습니다.” 유 과장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미의 ‘독’도 의료·바이오 분야의 자원으로 각광받는다. “모든 거미는 위턱에서 독을 분비해 먹잇감의 내부를 녹인 후 주사기처럼 영양분을 빨아 먹습니다. 이 독을 마취제 등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최근에는 어떤 거미에 비아그라 같은 효과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유 과장은 거미 연구를 하며 뿌듯했던 일은 연구한 거미에 이름을 직접 붙일 때라고 말했다. “호주에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을 때 늑대거미를 연구하면서 7종의 신종을 발표하게 됐는데, 그중 4종에 아버지, 어머니, 아내, 그리고 김주필 교수의 이름을 따서 붙여 학술지에 발표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그는 미래에 아름다운 거미를 발견하면 두 딸의 이름을 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수(13), 다혜(10)라는 이름이 붙은 거미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글·박지현/사진·김현동 기자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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