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철커덩철커덩, 삐이익~.”
4월 7일 오후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본사 건설장비 시험장. 바닷가 옆에 있는 시험장의 모래언덕에서 거친 기계음을 내며 굴착기가 앞뒤로 흔들리고, 커다란 굴착기 버킷(굴착기 앞부분에 달려 있는 바구니 모양의 구조물)이 수차례 회전하며 흙을 퍼내는 작업을 한다. 굴착기가 움직일 때마다 거센 모래바람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다.
30여 분쯤 지나자 작동을 멈춘 굴착기의 운전실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채 스카프로 코와 귀를 둘러싸고 안전모를 쓴 운전사가 내린다. 영락없는 건설현장 남성의 모습 같지만 이 회사의 건설장비 설계 분야에서 금녀의 벽을 허문 건설장비개발1부 굴착기 설계부의 이선경(39) 차장이다.
이 차장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건설중장비 설계 분야에서 우먼파워를 과시하는 여성 엔지니어다. 2001년부터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울산대에서 자동차공학을 전공한 그의 업무는 굴착기 설계 및 개발이다.
남성 중심의 건설장비 설계를 선택한 데는 ‘도전정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차장은 “용도나 중량의 차이는 있지만 자동차나 건설장비의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며 “여성이라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14년차의 베테랑 설계사가 됐지만 그의 도전은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휠로더’ 스‘ 키드로더’ ‘카울링’ ‘데칼’ 등 낯선 건설장비 전문용어와 기계를 익히는 것에도 진땀을 뺐지만, 육체적 피로감은 큰 고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굴착기 설계 분야는 현장에서 굴착기를 직접 시운전해 보고 현장을 발로 뛰며 남성 작업자들을 만나 의견을 듣는 등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뒤따르는 업무 특성 탓에 여성과는 특히 거리가 먼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 차장은 이런 선입견을 하나씩 깨뜨렸다. 남자 동료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다지는가 하면 잦은 야근이나 출장 등에서도 특혜를 받지 않았다. 더 나은 제품 개발을 위해 굴착기 운전자격증을 따내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설계실뿐 아니라 각종 현장에서 설계한 굴착기가 제대로 움직이며 작동하는지를 직접 점검하는 등 꼼꼼하게 챙겨야 더 나은 굴착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운전자격증까지 따면서 스스로 굴착기 프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그의 열정과 여성 특유의 섬세함·꼼꼼함은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회사의 굴착기가 업계의 호평을 얻은 데는 여성 설계자들의 역할이 컸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이 차장의 손을 거친 ‘굴착기 9시리즈’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다. 국내에서는 수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고, 해외로도 꾸준히 수출되는 제품이다.
이 차장은 “여성이 보는 관점과 남성이 보는 관점은 다르다”며 “유저 인터페이스를 제품에 완벽히 반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여성 설계자들이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동등한 대우 바라면 당당하고 용감하게 도전을”
여성 설계자들은 개발 업무뿐만 아니라 현장이나 부서에서 활력소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이 차장은 “부서 내 여성 설계자가 5명인데, 경직된 조직문화에서 윤활유와 같은 작용을 한다”며 “갈등관계에 있는 발주처와의 미팅에서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친근한 표현과 여유 있는 태도는 현장 근로자와의 관계 개선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힘든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직까지 여성 직원의 업무능력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중장비 분야에 대한 여성의 이해도가 낮을 것이라는, 그리고 가정으로부터의 독립성에서도 남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있다”며 “하지만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넘어야 할 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스스로 가치관을 세우고 자신의 일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같은 월급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면서 쉬운 일만 하려고 든다면 어떤 상사라도 중책을 맡기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며 “당당하고 용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만의 장점을 살려 건설장비 분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며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계 최고의 제품을 설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글·최재필 기자 201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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