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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기도 용인에 사는 김명도(89) 할아버지는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나 자랐다. 22년 동안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할아버지는 홀로 남한으로 넘어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9월 9일, 김 할아버지를 자택에서 만났다.

“북한에서 원래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원이었어요. 북한에서 교원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그걸로 성이 차지 않았거든요. 제가 옛날부터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았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컸어요. 그래서 해방이 되고 나서 남한으로 왔죠.”

혈혈단신 남한으로 온 김 할아버지는 먼저 남하한 고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 사람의 집에 모여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할아버지는 동국대학교에 진학했다. 중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할아버지는 서울 경신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교사도 됐지만,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알릴 길이 없어 할아버지는 내내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전쟁이 터졌고, 할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후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할아버지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았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김 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가족들과의 잠깐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38선이 막혀 다시는 가족들을 보지 못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 할아버지의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6명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부모님께서도 제가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아셨어요. 아버님께서도 교장선생님이셔서 제 마음을 잘 이해해주셨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장남이고, 다 큰 청년이니까 서울로 유학을 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 가족들 아무도 몰랐겠죠 .”

김 할아버지는 60년 넘게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여러 차례 했지만 아직까지 당첨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유학을 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향이나 가족들의 사진 한 장도 챙겨오지 않았다.

“서울에 올 때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왔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겠죠.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요. 남한으로 온 저 때문에 가족들이 불이익을 많이 당했을 것 같아요. 흘러들어온 이야기로 우리 가족이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어요. 미안한 마음이 커요. 죽기 전에 가족도 만나고, 고향 땅도 밟아봤으면 좋겠어요.”

명절이 다가오면 늘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다. 북녘에 두고 온가족이 더욱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김 할아버지는 “설, 추석, 생일 등 ‘이름 있는 날’이 되면 가족들 생각이 더 많이 난다”고 말했다.

글·김혜민 기자/캐리커처·박상철 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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