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보호보다 ‘똑같다’는 느낌 받고 싶어요

1

 

베트남·중국·키르기스스탄·필리핀. 출신 국가는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짧게는 8년, 길게는 17년 이상 한국에서 산 베테랑 주부다. 한국말은 여전히 어렵고, 생활 역시 실수투성이지만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힘차게 살아왔다.

남편 얘기에 말문이 트이고, 장바구니 물가에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에서 주부의 향기가 담뿍 전해진다. 4명의 다문화 주부와 ‘한국살이’에 대한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이들의 말 속엔 따뜻하게 품어준 ‘제2의 고향’에 대한 고마움과 다문화가정을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차가운 인식에 대한 서운함이 공존했다.

 

2

 

박클라라(40·키르기스스탄) “적응할 때가 됐는데 아직도 한국어를 배워요. 결혼 초기엔 명절에 시댁에 가서 폐만 끼쳤죠.

고모님께 언니라고 했다가 혼났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죠. 요즘은 시부모님과 농담도 하며 지내니까요. 아이를 보고 ‘얘는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세?’ 하시길래 ‘누구긴요, 어머니 아들 닮았죠’라고 했더니 크게 웃으시더라고요.”

황정화(26·베트남) “저는 시집와서 첫 추석이 생각나요. 시댁에 갔는데 무슨 식구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조카에 형님에 당숙에 이름 외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요. 한국말이라곤 ‘오빠(남편)’밖에 모를 땐데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다행히 말도 잘 못하는 며느리를 감싸주시는 시어머니 덕분에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죠.”

이연(26·중국) “돌아보면 역시 언어가 제일 문제인 것 같아요. 그나마 저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는데도 적응이 쉽지않았어요. 제일 큰 걱정은 아무래도 아이들이죠. 한국말 못하는 한국 아이로 키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금도 커요.”

베루엔(39·필리핀) “저도 큰아이가 세 살 때까지 한국말을 잘못해서 걱정이 많았어요. 제가 가르치면 오히려 방해가 될까싶어 일찍 어린이집에 보냈죠. 남편 역시 일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할 텐데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하려 노력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데 아이들이 아빠만 좋아하는 게 문제예요(웃음).”

황정화 “얼마 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학교에서 발음이 정확하다고 칭찬을 듣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담임선생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그런 것 같아요. 요즘은 오히려 제게 발음을 가르쳐줄 정도니까 기분이 좋죠.”

박클라라 “다행이네요. 저는 결혼 초 키르기스스탄에 살다 큰아이가 다섯 살 될 때 한국으로 왔는데, 어느 날 아이가 외국인 엄마를 부끄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12년 전이니 그때만 해도 한국에 다문화가정이 많지 않았거든요. 다문화가정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가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베루엔 “맞아요. 한국에는 외국인에게 약간 배타적인 문화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 한국에 와서 영어로 길을 물으려는데 도망을 가더라고요. 사실 이런 경험을 자주 했거든요.”

이연 “저는 택시를 탔다가 ‘말을 제대로 못하면 택시를 타지 말라’는 얘기도 들은 적 있어요. 저는 괜찮은데 혹시 우리 아이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까 걱정이죠.”

황정화 “저는 가르치기보다는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칼날이 안쪽을 향하는 한국과 달리 동남아국가 대부분은 칼날을 바깥쪽으로 하고 과일을 깎거든요. 그냥 방식이 다른 것뿐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어요. 어떻게 깎든 잘 깎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

이연 “그래도 보통의 한국인은 친절하지 않나요? 저는 살림하면서 주변 이웃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장 보는 것부터 요리하는 것까지요. 한국에는 따뜻한 정이 있는 것 같아요.”

베루엔 “저도 그래요. 아이 언어 문제로 고민할 때 다문화지원센터에서 선생님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큰 도움을 받았어요. 이웃분들도 아이에게 일부러 인사를 시키면서 친근하게 대해주셨죠.”

박클라라 “사회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집안에서 안정을 찾는 것 같아요. 사실 다문화가정에는 여러 위험 요소가 있잖아요. 언어라든지 문화 차이라든지, 남편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여성 입장에서는 20년 넘게 살면서 경험한 모국의 문화를 한순간에 버리기 쉽지 않거든요.”

황정화 “결혼이주여성들도 생각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완벽한 한국 남자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살아보면 아니거든요. 연애할 때는 그렇게 손을 잡고 다니더니 지금은 잡아달라고 해도 혼자 가잖아요(웃음).”

이연 “맞아요. 하기야 항상 다정다감할 순 없겠죠. 제가 볼 때 한국 남자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해요. 힘들 수밖에요. 여성들도 핑크 안경(한국 남자에게 갖는 환상)을 벗어야 해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우리집에 살진 않으니까요(웃음).”

베루엔 “한국에도 다문화가정이 많아져서 그런지 요즘은 주변에서 많이 배려해준다는 느낌을 받아요. 힘든 점은 없는지 챙겨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고마운 일이지만 보호받는 느낌보다는 (일반 가정과) ‘똑같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요.”

박클라라 “저는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으면 더욱 좋겠어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거죠. 앞으로 다문화가정이 더 많아질 텐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려면 ‘힐끔거리는 눈빛’이나 ‘경계하는 목소리’가 먼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한국이 그런 나라였으면 좋겠어요.”

글·장원석 기자 2013.09.06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