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책벌’이죠

1

 

“교수님 책 빌려갑니다. 감사합니다.♥”

서재 곳곳에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이화여대 종합과학관에 위치한 최재천 에코과학부 교수의 연구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양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이 가득하다. 마치 아담한 도서관에라도 들어선 듯한 느낌이다. 미처 책장에 자리를 잡지 못한 ‘잉여 책’들은 바닥과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저는 ‘책벌’이에요. ‘책부자’라는 뜻이죠. 재벌·족벌·학벌….
우리는 흔히 나쁜 의미로 ‘벌’자를 사용하죠. 하지만 제가 만든 ‘책벌’이라는 말을 두고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책은 정말 좋은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또 한번 얻었죠.”

 

7

 

최 교수의 연구실은 전문분야인 곤충 표본과 미니어처가 곳곳에 있을 뿐 대부분 책으로 둘러 쌓여 있다. 그만큼 책을 좋아하고 아낀다. 그는 2006년 서울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연구실을 새로 단장하며 이름을 ‘통섭원’이라고 지었다. ‘모든 사물은 다 통한다’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그의 서재도 진화학·사회생물학·동물행동학·영장류·뇌과학·종교·생태학, 그리고 자연관련, 과학전반, 문화사회 등 다방면의 책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생물학자의 서재 같지는 않다.

“제 관심사는 생물학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평생 인문학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죠.(웃음) 그런 만큼 제 서재에는 ‘세상의 좋은 책은 다 꽂고 싶다’는 ‘책 욕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최 교수가 국내외로 명성이 자자한 학자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보내주는 책도 많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서점에 들러 사 모은 책들도 상당하다. 연구실에 있는 책만 3,000여 권, 집에 있는 책까지 합하면 무려 1만여 권에 달한다.

연구에 필요한 원서들은 아마존에서 구입하고 관심이 가는 국내 서적은 인터넷 서점에서 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책들이 넘쳐나는 최 교수의 서재는 제자와 손님들의 도서관 노릇까지 한다. 서재 곳곳에 붙은 포스트잇은 모두 책을 빌려간 흔적들이다.

“제가 전문서적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편에 속하고, 그 외 희귀본도 많아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많아요. 빌려주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한번 빌려준 책들은 대부분 안 돌아옵니다. 책에 발이 달렸나?(웃음) 책 끼고 죽을 것은 아니지만 막상 내가 그 책이 필요할 때 없으면 난감하죠.”

2
그럼에도 그가 절대 빌려주지 않는 책이 있다. ‘가장 아끼는 책’이 무어냐는 질문에 최 교수는 책장으로 다가가 작고 낡은 책 하나를 꺼내온다. 최 교수의 손때가 묻어있고 군데군데 테이프를 붙여 복구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책이다. 책 모서리에는 옛날 방식으로 ‘JAE C. CHOE’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프랑스 생물학자 쟈크 모노(Jacques Monod)의 생물철학원서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essity)>의 복사본이다. 서울대 재학 당시 접한 이 책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8“내가 이 분야에 뛰어들게 만든 책이죠. 우연히 이 책을 읽고는 감명받아 복사본을 만들어 같은 과 친구들과 교수님 70명에게 돌렸을 정도예요. 그런데 책값이 수금되지 않아 크게 손해를 봤습니다. 지금도 전국의 생물학 교수님들 방에 가보면 대부분 이 책이 꽂혀 있어요. 그럴 때면 ‘그때 돈 냈느냐’고 묻고는 합니다.”(웃음)

최 교수는 평소 꾸준한 집필 활동도 펼치고 있다. 현재는 <다윈의 사도들>을 집필중이다. ‘예수의 12사도들’을 패러디한 제목이지만 내용은 묵직하다. 다윈의 이론을 열심히 알리는 학자 12명을 최 교수가 직접 만나 인터뷰 해 엮고 있다. 올해 작업을 끝내고 내년쯤 발간할 예정이다.

“집사람은 ‘전생에 책 못써 죽은 귀신’이냐고 하지만 저는 책과 같이할 일이 정말 많아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책이나 논문을 읽고 책을 쓰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지만 엉터리로 책을 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예민하게 챙겨요. 책은 나의 삶이자 ‘자식보다 더 어려운 존재’입니다.”

최 교수는 이처럼 책 속에 파묻혀 살지만 최근 들어 종종 책에 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연구·집필·강연 등으로 바쁘다 보니 예전처럼 책을 진득하게 읽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빠서인지 필요한 부분만 골라 공격적으로 읽게 돼요.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 맛이 있는데, 이제는 그런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이와 관련해 최 교수는 최근 저서인 <통찰>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에 대한 통찰과 현재에 대한 통찰을 가지면 미래에 관한 통찰이 가능하죠. ‘스키너의 쥐와 퀼러의 침팬지’ 실험을 보면 통찰력은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고 이후 길러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면 통찰력이 길러져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글·김지연 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