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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큰언니 역할 서울 송파경찰서 문영자 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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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자(43) 경사가 처음 신변보호관 업무를 맡은 것은 지난 1998년, 서대문경찰서에서 일할 때였다. 그는 처음 맡은 한 탈북 가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탈북 과정에서 어머니는 공안에 잡혀 가고 아버지와 아이들만 넘어온 경우였는데, 문 경사는 이 집에 매일 가다시피하면서 아이들을 돌봤다고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 먹이고, 시험 잘 보면 잘했다고 친구들 불러서 떡볶이 사주고 했던 생각이 나네요. 이제는 대학생이 됐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을 모르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나요.”

서울 송파구는 강서구, 양천구 등과 함께 탈북자가 많이 사는 지역이다. 송파구 관내에 거주하는 탈북자 중 문 경사와 인연을 맺고 있는 탈북자는 50여 명. 그중에는 한국생활에 잘 적응한 사람도 있고,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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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김모씨는 북한에서 상처한 후, 노모에게 어린 자녀를 맡기고 5년 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 이후 두고 온 자녀를 데려오는데 실패했고 동생이 탈북하려다 국경에서 체포돼 수용소로 잡혀간 걸 알게 됐다. 이에 김씨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술만 마시는 등 남한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7문 경사는 김씨가 운전에 대한 특기를 살려 부근의 버스 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몇 달 후 수습과정을 거친 김씨는 정직원으로 채용됐고 현재도 잘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문 경사에게 ‘맞춤형 취업 컨설팅’을 받은 탈북자가 많다. 문 경사는 “탈북자들은 계기가 주어지면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다”며, 자신은 “그 계기를 마련해 줬을 뿐”이라고 했다.

문 경사의 소개로 만나 가정을 이룬 탈북자도 있다. 한국에 들어와 열심히 일하며 전문직 자격증까지 딴 탈북자 A씨에게 배우자를 소개해야겠다고 문 경사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안보강연을 온 B씨를 보고 ‘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평양에서 대학을 나온 A씨처럼 B씨도 북한에서 대학을 나왔고, 한국에서도 둘이 같은 분야의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 자주 인사를 오는 이들의 단란한 모습은 문 경사의 큰 자랑거리 중 하나다.

얼마 전 문 경사에게 자랑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송파구 관내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만들어진 ‘특별’한 밴드가 그 주인공이다. 밴드는 탈북 어린이들과 이들의 멘토를 맡은 재학생 등 총 20여 명으로 이뤄져 있다. 왜 하필 음악이냐고 묻자 문 경사는 “탈북 어린이들이 제일 해보고 싶은 걸로 ‘악기 연주’를 골랐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고위층 등 부유한 아이들만 악기를 배울 수 있어요. 북한에 있을 때 바이올린, 아코디언,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자유자재로 배우는 아이들을 보며 참 부러웠나 봐요. 악기 연주가 제일 배워보고 싶은 거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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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결성을 위해서는 우선 악기 구입비용 등 예산이 문제였다. 문경사는 송파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에 이 사실을 전했다. 사정을 들은 보안협력위원들은 악기 구입 비용을 대기로 했다. 악기 문제가 해결됐지만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를 가르쳐 줄 선생이 없는 것. 문 경사는 평소 알고 지낸 아르미청소년재단 관계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재단 관계자가 아이들과 직접 면담한 후 교사지원을 결정했다.

밴드의 일원이 된 탈북 어린이들은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다고 한다. 열심히 연습해 충북 보은에 있는 ‘꽃동네’ 등 사회시설을 찾아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정해 도전해 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마음도 치유되는 것 같다”고 문 경사는 말했다.

사실 탈북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는 아동 문제와 여성 문제가 중첩돼 있다. 북한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넘어온 아이들이 많다 보니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경쟁 위주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문 경사는 설명했다.

“1990년대 일명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정규 교육 과정이 붕괴됐다고 보면 됩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도토리와 잣을 할 당량만큼 따야 해서 실질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이 때문에 남한에 와서 학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많은 거죠.”

문 경사가 지난해 7월 만난 탈북 어린이 형제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문 경사는 지역사회의 힘을 빌렸다. 지역아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방과 후 공부방에서 형제가 공부 지도를 받게 했고, 태권도장에 부탁해 태권도도 배우게 했다. “형제가 태권도장에서 다른 아이들과 몸을 부딪쳐 가며 운동하면서 우정도 쌓고 자신감도 커졌다”고 문 경사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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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들도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긴 마찬가지다. 탈북 과정에서 물리적·성적 학대를 당한 경우도 있고,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 경사가 맡은 C양 자매도 마찬가지다. 문 경사는 자매들이 어떤 직업에 적합할지 상담한 후 컴퓨터를 다루는 업종이 적합하다고 판단해 이들을 컴퓨터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요즘은 일요일이면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등 마음을 활짝 연 자매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문 경사의 눈에 살짝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문 경사는 “탈북자들의 신변보호관 일을 하며 힘든 적도 많았다”며 “그렇지만 희망을 보려고 한다. 우리가 다가서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주기만 한다는 건 사실 힘든 일 아니냐”고 하자 문 경사는 답했다. “직업인데 그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어요? 이들이 잘 살아야 통일 후 우리 사회가 안정되는 주춧돌이 될 수 있잖아요.”

글·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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