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포스코청암상 교육상 받은 곽종문 한겨레중고등학교 교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6년에 제정된 포스코청암상은 매년 과학·교육·봉사 3개 부문에 걸쳐 시상한다. 그중 교육 부문 수상자인 곽종문 한겨레중고등학교 교장을 만났다. 그가 제도권 밖 교육에 투신해 온 30여 년의 세월은 한 편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 감동적이었다.
곽종문 교장은 전북 장수의 평범한 가정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늘 궁핍했다. 집안일보다 공직이 우선이고, 타협을 모르던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는 밀주와 도박 단속을 하다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그 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엄청난 빚을 갚느라 7남매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집을 나와 과외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학을 했어요. 장수 읍내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전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는데, 고등학교 동창생 2백40명 중 대학에 간 사람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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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생물학과에 진학한 그는 고향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방학이 되자 대학 동기생들을 끌고 모교로 갔다. 방학 때나마 후배들 공부를 돕기로 한 것이다. 전북대 앞에 청소년 근로자들을 위한 야학도 설립했다. 재원은 그가 발로 뛰어 마련했다.
“아는 분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7백만원을 빌려 몽땅 엿을 샀어요. 다섯 수레나 되는 엿을 친구들과 함께 팔았습니다. 예비고사가 10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라 잘 팔리더군요. 원금을 갚고도 3백만원이 남아 그 돈으로 야학을 설립했지요.”
그는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과외를 했으며, 늦은 밤에는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숙식은 야학 교실에서 해결했다. 학생이 1백80~2백명 선을 유지할 정도로 야학은 인기있고 규모가 컸다. 그는 “전북 지역에서 가장 큰 야학이었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이 되자 그는 또 다른 모험을 감행했다. 야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주소년원이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이다. 생면부지의 젊은 대학생이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겠다고 하자 원장은 코웃음을 쳤다. “여태껏 그런 사례가 없고, 나쁜 놈들한테 무슨 공부를 시키느냐”며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아직 나이가 어리고 미래가 있으니 공부를 시키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덕분에 “전체 원생 8백명 중 우선 1백80명만 가르쳐보라”는 허락을 겨우 받아냈다.
이후 야학에 동참한 대학 선후배들을 이끌고 소년원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그러느라 전공 수업을 빼먹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그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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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에 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아이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잔여 형량에 상관없이 출소할 수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 의욕이 솟구쳤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가르쳐 1백80명 전원을 석방시켜보자’는 목표가 생긴 것이지요.”
그로부터 1년이 채 안 된 1983년 12월 9일, 중앙 일간지 사회면에는 전주 소년원 재소자 1백80명이 검정고시에 합격해 일제히 출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소식은 공영방송 9시 뉴스에도 보도됐다. 1백80명의 빡빡머리 소년 재소자들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가방 하나씩을 메고 소년원 문을 나서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는 제자들을 보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또한 자신이 평생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전국 소년원의 교화 방법이 바뀌었고, 전주소년원장은 업적을 인정받아 최고위까지 올라갔다.
군 복무 후 그는 지인의 요청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성지고등학교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전남 영광에 있는 이 학교는 일종의 직업학교인데,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학생 수가 줄어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는 ‘인간 쓰레기를 모아 재생시키는 공장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현장에 갔다고 한다.
“비유가 맞을지 모르지만 부잣집에서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법이죠. 나라가 부강해질수록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밖으로 밀려나는 아이가 많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다시 주류 사회로 들어가 살 수 있게 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전국에 ‘문제아들은 다 모여라’고 공고를 내니 소위 말하는 ‘꼴통’들이 모여들었다. 70퍼센트가 소년원 출신이었다. 전주소년원 경험이 이들을 지도하는 데 많은 힘이 됐다.
“밤만 되면 싸우고 부수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을 일반 학교처럼 가르칠 수는 없었습니다. 교과서와 시간표를 없애고 교사 한명당 학생 5~6명을 맡는 그룹 지도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수준별 수업, 맞춤형 교육을 한 것이죠. 학교생활이 즐겁고 바빠서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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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교내에 흡연실을 만들고, 당시 유행이던 디스코텍도 만들었다. 학교 밖이 아니라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교사들의 이런 노력으로 아이들은 저마다 안고 있던 상처를 딛고 밝고 건강한 청소년으로 거듭났다.
그 결과 성지고등학교는 2001년 OECD에 의해 세계 우수학교에 선정돼 미국, 일본, 독일 등의 선진국에 소개됐다.
2004년 그는 교과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설립이 시급한데, 곽 교장이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2006년 개교한 이 학교에는 현재 일반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탈북 청소년 2백명이 재학 중이다. 그는 “성지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요즘도 학교 기숙에서 학생들과 스킨십을 나누며 가족처럼 지낸다”며 “그동안의 경험으로 상처 많은 탈북 청소년들이 한국 사회에 연착륙하고, 통일역군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글·서철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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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