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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보고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 실수는 박태준이라는 사람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한 일을 해내는 바람에 내 분석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1986년 영국의 존 자페 박사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만나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자신의 보고서가 박 회장 탓에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이었다. 연유는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나라는 5개국 8개사가 참여하고 있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에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차관을 요청해놓고 있었다. 우리 측의 끈질긴 설득에 긍정적인 약속도 받아놓았다.

하지만 KISA의 태도는 돌변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한국에 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라는 보고서가 결정적인 이유였다. 존 자페 박사는 당시 보고서 작성의 실무책임자였다. 20년이 지나 자페 박사는 ‘박태준’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박 회장은 세계가 인정하는 철강왕이다. 조업을 시작한 지 단 6개월 만에 흑자를 냈고 맨땅에 제철기업을 일으킨 지 고작 14년 만에 현역 철강인으로는 처음으로 철강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베세머 금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에는 2천1백만톤 생산체계를 구축하며 세계적인 철강상으로 꼽히는 ‘윌리코프상’을 받았다.

박 회장은 소명의식과 책임감이 강한 리더였다. 가난한 조국의 발전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철과 같았다. 포스코의 성장에 대한 공로를 들을 때마다 그는 “국가를 위해 한 일이 뭐 대단하다고”라고 답했다. 국가를 위한 소명의식은 무한책임과 강인한 집념으로 나타났고 이는 무일푼으로 세계적인 제철기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됐다.

51968년 포항제철 사장 부임 후 가장 큰 고민은 ‘돈’이었다. 제철소를 지을 돈이 없었다. KISA에 희망을 걸었지만 무산됐다. 박 회장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사용하기 위해 일본을 설득했다.

농업용으로 제공됐지만 제철소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박 회장은 보는 이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의 진지한 노력에 일본이 감동했다”고 회고했다.

자금을 확보한 그는 직원들에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 돈은 보통 돈이 아니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죽어야 합니다.”

박 회장과 동료들의 ‘필사의 의지’는 기적을 낳았다. 착공 39개월만에 첫 쇳물을 얻을 수 있었다. 대개 제철소 건설에 4년 이상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포항의 영일만은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박 회장의 사인인 폐 손상은 당시 그가 들이마신 모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의료진의 판단이다.

‘투명함과 청렴’은 기업인으로서 박 회장이 높은 평가를 받는 또다른 이유다. 세계적인 기업을 창업한 그이지만 남긴 유산이 전혀 없을 정도다. 1988년 포스코가 직원들에게 10퍼센트의 지분을 우리사주로 나눠줄 때조차 그는 단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직원들에게도 늘 강조한 것이 ‘투명’이었다. 취임 당시부터 “금전이나 물자를 받는 등 부정행위가 없게 하고, 오해받을 행동도 하지마라”고 당부했다. 그래서였을까. 포항제철의 건설비는 다른 곳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국내에서 투명경영이 화두가 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였다.

포항제철은 로비가 통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했다. 당시 제철소 설비 변경을 할 때 일본에 있는 ‘주일구매소’의 간섭이 심했다. 품질이 낮은 제품을 더 비싼 가격에 구매하라는 식이었다. 정치권도 청탁을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이 모두를 물리쳤다. 자신의 호인 청암(靑巖)처럼 그의 청렴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제철보국’과 함께 박 회장의 공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교육보국’이다. 박 회장은 1986년 포항공대(현 포스텍)를 그 이듬해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설립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대를 모델로 삼은 포항공대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으로 학생 전원 학비 면제 등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1988년에는 당시로선 천문학적 액수인 1천4백억원이 소요되는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포항공대는 단기간에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대로 발돋움했다. 교육과 인재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은 이런 말로 표현됐다. “학생들이 공부만 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포항공대 벽에 금칠을 해달라고 하면 금칠이라도 해주겠다.” 박 전회장의 마지막 공식직함 중 하나는 ‘포스코청암장학재단’ 이사장이었다. 집도 주식도 없는 그는 인재를 남겼다.

글·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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