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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대장은 도전에 늘 목말랐던 사나이였다. 그는 한 번의 혹독한 실패 후 “다시 오면 내가 개다”라고 할 만큼 치를 떨었던 북극점에 재도전해 2005년 4월 마침내 태극기를 꽂았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미터 14좌, 7대륙 최고봉, 3극점(남·북극, 에베레스트)에 모두 도달하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때 박영석 대장의 도전이 마침표를 찍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 대장은 “1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면 어디든 도전한다”며 다시 장비를 꾸렸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영혼의 고향’이라고 부르던 히말라야에서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과 함께 잠들었다.

박 대장은 서울 토박이다. 위로 누나가 4명이었던 그는 6남매의 장남으로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오산고 사격부에서 활동했던 그는 고2 때인 1980년 히말라야 마나슬루를 등정하고 돌아온 동국대 산악부의 카퍼레이드를 보고 가슴속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 박 대장은 곧바로 산악부에 가입했다.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8천8백48미터)를 무산소 등정한 그는 2001년 7월 K2(8천6백11미터)에 오르며 히말라야 8천미터 14좌를 완등했다. 당시 세계 최단기간 등정 기록(8년2개월)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14좌에 올랐지만 그는 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었다. 1991년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1백미터를 굴러 떨어져 마취도 하지 않고 얼굴에 철심을 3개나 박았다. 1995년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긴 북동릉을 오르다 눈사태를 맞아 눈더미에 파묻혔지만 셰르파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97년에는 다울라기리(8천1백63미터)에서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하다가 얼음기둥에 배낭끈이 걸리며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북극점을 밟으며 ‘산악 그랜드슬램’을 이룬 박 대장에게 강연 등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제의가 쏟아졌지만 그는 “탐험가에겐 정년이 없다”며 또 다른 모험을 택했다. 박 대장은 산에 오르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라 믿었다. 히말라야에 자신의 길인 ‘코리안 루트’를 내고 싶었다.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고자 떠난 박 대장은 5년 이상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후배 대원 둘을 눈사태로 잃었다. 후배들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재우고 먹이며, “선배는 무조건 주는 존재”라고 할 만큼 후배 사랑이 각별했던 그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


한동안 술에 절어 살았던 그는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결국 ‘한국인의 길’을 냈다. 박 대장은 에베레스트와 함께 ‘히말라야 3대 남벽’으로 불리는 안나푸르나와 로체에 ‘코리안 루트’를 낸 후엔 뒤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자신을 도와준 셰르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네팔 카트만두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병원도 지을 예정이었다. 소외 계층을 돕는 ‘희망찾기 등반대회’도 꾸준히 이어갈 사업이었다.

올 6월엔 지난 11년간 뉴질랜드에서 두 아들 성우·성민을 돌보던 부인 홍경희씨가 영구 귀국해 한층 안정을 찾았다.

지난 18일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에 나섰던 박 대장 일행은 짙은 안개와 낙석 위험으로 오후 4시(현지시각) 하산을 결정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베이스캠프와의 교신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내려오다 죽을 뻔했다”며 터뜨린 너털웃음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박 대장은 평소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자주 불렀다. 도전밖에 모르던 ‘아름다운 바보’는 그렇게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의 품에 영원히 안겼다.

글·장민석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영석아! 하루에도 몇 번씩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네가 등반을 떠나기 전,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신 때가 불과 두어 달 전인데…. 이제 너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오는구나. 너무나 당혹스럽고, 무어라 할 말이 없다. 특히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 그리고 너의 아내를 대할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하구나.

1989년 겨울, 너와 내가 카트만두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내가 네팔 카트만두 시내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을 때였지. 너는 그때 20대 후반의 청년이었고. 하지만 넌 벌써 랑탕리원정대장으로 후배들을 이끌고 왔었지. 만난 첫날부터 우리는 죽이 척척 잘 맞았는데 말이야. 그날 밤 어깨를 걸고 카트만두 시내를 누비고 다녔잖아. 어떻게 하루 만에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 아마 산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일 거야. 그때부터 너를 후배 이상으로 생각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망원동 너희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아버지·어머니께 폐를 끼쳤던 생각이 나는구나. 새삼 두 분들께 고맙구나.

너랑은 히말라야 등반은 물론 네팔에서 함께 장사도 하고 여행사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내 30대는 너와 함께한 시절이었다. 96년 안나푸르나 등반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갈 때도 나는 너를 항상 응원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박영석과 엄홍길을 비교하기를 좋아했지. 그때마다 우리는 ‘허허’ 웃고 말았지만 말이야. 너하고 나 사이는 라이벌보다는 반면교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히말라야엔 내가 먼저 발을 내디뎠지, 너를 앞세우고 등반을 한 적도 있고. 하지만 히말라야 열네 봉우리를 넘어 남극·북극·코리안신루트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너는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네 모습에서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네 나이 올해로 마흔여덟. 내가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중단한 때와 비슷하구나.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더 강하게 너를 말렸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번 원정만 다녀오면 뒤로 물러나겠다’는 너의 말만 듣고 더 이상 붙잡지 않은 내가 너무 원망스럽다. 당뇨가 있으면서도 벽 등반에 매달리는 너를 더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나 영석아, 너의 도전 정신은 산악인 후배는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전해질 거라 믿는다.

영석아, 나는 네가 지금도 ‘형, 큰일날 뻔했어요’ 하고 허허 웃으며 베이스캠프로 걸어 내려올 것만 같구나. 세상 모든 것이 별것 아니라는 듯 털털하게 미소를 지으며 지금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영석아, 네가 어디에 있든 너를 가슴에 간직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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