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일은 작가의 새 장편소설 <흑산>(黑山·학고재 출간)의 출간일. 천주교 박해의 절정이었던 19세기의 전반부 50년이 시간적 배경이다. 신앙에 매혹됐다 배교(背敎)한 뒤 흑산도에 유배 갔던 정약전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산 지식인과 백성들이 겪은 풍상(風霜)이다.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질문을 받기 전 10분 동안 모두(冒頭) 발언을 했다. 수첩에 적어 온 내용을 돋보기 쓰고 줄줄 읽은, 2백자 원고지 10장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다윈·진화·순교자·배교자였고, 발언의 핵심은 인간의 진화와 자연의 진화가 마지막에 만나는 지점을 그려 내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도덕과 정의를 꿈꾸는 인간과,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적자생존하는 자연의 진화.
그는 다산 정약용 4형제의 기막힌 잔혹사를 예로 들었다. 가부장으로 집안만을 지킨 장남 약현(이복 맏형), 천주교를 믿었다가 배교한 둘째 약전, 순교한 셋째 약종, 그리고 남들까지 밀고해 살아남은 막내 약용. 작가는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집구석 같지 않으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먼저, 왜 정약전이었나.
“이 소설에는 많은 순교자가 나오고, 많은 배교자가 나온다. 배교의 최정상에는 정다산(정약용)이 있다.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배교를 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천주교 동료와 교인을 밀고했고, 아마도 그 대가로 목숨을 부지해서 엄청난 학문적 저작을 남겼으며, 자손만대 추앙을 받고 있다. 그의 선택이었다.
반면 정약전은 세례를 받았다가 배교한 뒤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그곳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없고, 언어와 문자도 없고, 언어를 교환할 사람도 없다. 그 섬에서 약전은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하나를 남겼지. 한없는 답답함과 슬픔을 느꼈다. 소설에는 그 슬픔이 군데군데 배어 있다.”
정약전과 다윈이라니.
“자유·영혼·인간의 불멸, 그런 목표를 향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있고, 다 버리고 현세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약전은 현세로 돌아온 사람이다. 다윈이 말한 진화와 변화에는 인간의 자유나 이성, 도덕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살기 위한 거대한 자연의 질서다. 이들이 마지막에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을 끝냈을 때 (학고재 출판사의) 손철주 주간이 속표지 그림을 그려 오라는 가혹한 주문을 했다. 문득 수억만 년 시공을 날아가는 새가 떠올랐다. 진화의 끝을 향해 날아가는 다윈의 새. 정약용과 정약전은 수많은 글과 편지를 남겼는데, 자기 형제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다. 침묵으로 묻어 버린 고통들. 배교자와 순교자가 모여 수억만 년을 날아가는, 진화의 끝을 향해 날아가는 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소설이라는 표현을 거부했다. 이 소설이 현대에 가지는 의미는.
“인간의 시대는 정약전의 시대이건 지금이건 다 똑같다.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의 해결책으로 공정거래를 얘기하는데, 공정거래가 완성된다고 약육강식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공정한 약육강식’이 있을 뿐이다. 시장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의 딜레마다. 당대의 일을 대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흑산>의 시작은 무엇에서 비롯되었나.
“흑산은 다윈의 새가 가야 할 수억만 년 시공 너머의 섬이다. 우리나라 섬 중에서 소설 제목이 될 섬은 ‘흑산’ 밖에 없지 않을까. 완(도), 연평(도), 울릉(도), 좀 이미지가 안 맞잖아(웃음). 15년 전 일산으로 이사온 뒤 자유로를 타고 한강을 따라 서울에 드나들었다.
옛 양화진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는데, 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잠두봉(蠶頭峰)이었다. 이 봉우리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사학(邪學)의 무리라고 해서 1만명 넘게 죽였다. 너무나 많은 충격을 받았다. 무의미한 흙덩어리에서 빚어진 죽음. 나는 즉물적인 사람이다. 책을 읽어서는 생각이 잘 안나고, 이런 걸 봐야 생각이 난다.”
그래도 책은 당신 삶인데.
“내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건 추호도 자랑이 아니다. 내 친구 중에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놈들이 있다. 그런데 나보다 인격도 고매하고, 세상도 더 잘산다. <흑산>은 무수히 많은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
그중에는 <정감록>이 가장 큰 몫을 했다.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다. 하나 더. <흑산>의 주인공은 정약전이 아니다. 형식적 주인공은 그일지 모르지만, 무수히 많은 백성과 지식인이 등장한다. <흑산>에는 주인공이 없다.”
어쩌면 <칼의 노래>에서부터 <흑산>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사실상 모두 김훈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누구는 ‘동어반복’이라 비판하고, 누구는 그래서 좋다고 한다.
“나는 1인칭에 대해 과도한 집착이 있다. 3인칭이 무섭다. 내가 아니라 그를 어떻게 알고 쓸 수 있겠는가. 3인칭을 온전히 쓰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동어반복’이란 비판은 나로서도 괴롭다. 그 말이 나오면 우리말의 비극을 말할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봐라. 1백퍼센트 동어반복이다. 가령 노란색은 사전에 개나리꽃 빛깔이라 나와 있다. 결국 거대한 동어반복의 시스템. 언어가 갖고 있는 기본적 비극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자라면 극복해야 할 숙제겠지.”
글·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남한산성> 이후 김훈의 4년 만의 장편 역사소설.
지난 4월 경기도에 있는 선감도라는 섬에 들어가 칩거 5개월 만에 2백자 원고지 1천1백35장 분량으로 완성했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86년 병인양요까지 조선사회 전통과 충돌한 천주교를 중심으로 정약전 황사영 등 지식인의 내면 풍경과 민초들의 참상을 담았다. 순교자와 배교자는 그 단어 자체에 옳고 그름, 선과 악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지만, 김훈의 <흑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배교한 뒤 평생 물고기만 들여다보고 살았던 정약전과, 천주교도들을 어떻게 잡아들여야 할지까지 밀고했던 정약용, 그리고 구름 위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황사영까지, 모두 부분의 진실이 있다. 자신을 누구의 삶과 겹쳐 놓을지 여부는 독자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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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