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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춤 대가 공옥진 여사 뇌졸중 투병




 

추석을 며칠 앞두고 찾은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공옥진(78) 씨의 집. 대문 우체통에는 거두지 않은 우편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석 달 전에 보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올 상반기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기록을 확인해달라는 통지문이었다. 안내용지가 상당히 두꺼운 것으로 보아 공 씨가 그동안 얼마나 자주 병원을 찾았을지, 또 병세가 크게 호전되지 않고 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리니 30대 후반의 간병인이 나왔다. 간병인은 5년 전 영광군청 지원으로 건립된 국악전수원에 딸린 양옥형 한옥의 문간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13제곱미터 남짓한 크기에 침실과 거실, 부엌을 겸할 수 있도록 설계된 그 방이 바로 공 씨의 거처였다.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공 씨는 기자를 다정하게 맞이했다. 하지만 표정만 웃고 있을 뿐, 병색이 역력했다.
 

“말을 길게 못해요. 말을 하면 왼쪽 얼굴이 너무 아파요.”
 

공 씨의 첫마디다. 발음이 부정확해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간병인의 도움으로 그 뜻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 씨는 인터뷰 내내 어눌한 말투로 “예” “아니오” 식의 단답형 대답만 했다. 때론 말 대신 고개와 손짓을 사용하기도 했다. 통증 때문인지 두세 발자국도 걷지 못했다.

 


 

방안 한쪽 벽에는 외출복 네댓 벌이 가지런히 걸려 있고 아랫목에는 초봄에나 덮는 이불이 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끈 것은 그가 손을 뻗어 닿을 만한 곳에 약봉지와 함께 놓인 거울과 사진첩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그는 자주 거울과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화려했던 지난날을 돌아보곤 한다.
 

어떤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자 공 씨는 “카네기홀, 라스베이거스, 영국 국제예술제…”라고 더듬더듬 말했다. 순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공 씨가 이처럼 힘들게 사는 것은 뇌졸중과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이다. 5년 전인 2004년 여름 어느 날 그는 서울 여의도 KBS에서 녹화를 마치고 나오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 1998년에 이은 두 번째 뇌졸중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몸의 왼쪽 기능이 마비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 근육의 통증이 심해지는 3차 안면신경통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다.
 

그의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이어졌다. 2년 전 산책을 나갔다가 집 앞 큰길가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뇌졸중으로 몸의 기능을 잃은 터라 몸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공 씨가 영광에서 본격적으로 살게 된 것은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다. 처음엔 만년의 예술혼을 불태우며 뇌졸중도 이겨낼 것 같았다. 한동안 그는 뇌졸중을 딛고 국내외에서 공연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몸을 돌보지 않는 그의 투혼은 결국 두 번째 뇌졸중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간병인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며 질긴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간병인 김순옥 씨는 “공 선생님은 하루 식사량이 몇 숟갈 정도밖에 되지 않아 기력이 전혀 없다. 통증이 심해 병원을 자주 찾는다”고 전했다.
 

현재 그의 하루 일과는 20제곱미터 정도의 마당에서 하루 한두 차례 산책하는 것과 매일 병원에서 침과 주사를 맞으며 통증을 줄이는 일이 전부다. 그는 이날도 통증이 심해져 인터뷰 도중 병원으로 실려갔다.
 

공 씨는 자신의 병마보다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음을 더욱 가슴아파했다. “말하는 것도 어려운데 어찌 다시 공연을 할 수 있을꼬!” 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마저 안타깝게 했다.
 

공 씨는 1933년 전남 순천시(옛 승주군) 추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대일 명창으로 당시 판소리 명창인 공창식, 공기남 씨와는 한집안이다. 판소리 명문가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공 씨는 어려서부터 특출했다. 당대의 춤꾼과 명창들에게 판소리를 익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연희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최승희 씨 밑에서도 생활했다.
 

공 씨의 ‘병신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8년 서울 공연 이후부터다. 그의 춤은 독창적인 1인 창무극이다. 판소리나 민요와 같은 노래와 재담, 몸짓인 무용이 함께 어우러지는 극을 말한다. 그는 무대에서 혼자 2시간 동안 창과 무용, 연기를 하며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드는 그만의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했다.
 

병신춤은 그야말로 그가 살아온 삶을 농축한 것이다. 그는 신체장애를 가진 동생과 조카들을 보며 자랐기에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광복 후에는 가족과 헤어져 신체장애가 있는 걸인, 각설이패와 함께 생활했다. 그때 그는 일반인과 다르게 손과 발을 뒤틀거나 꼬고 다시 풀어헤치며 흥과 멋을 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병신춤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서민적인 1인 창무극은 미국 링컨센터와 카네기홀, 일본, 영국, 유럽 등지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그의 수제자 3명 모두가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아무리 배워도 공 씨의 독창적인 ‘춤’을 터득하는 게 불가능한 데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사실 그의 병신춤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방학 때만 되면 그의 집 앞에는 문하생을 자청하는 소리꾼들이 줄을 섰다. 그러나 모두들 스스로 그만두고 말았다.
 

아직도 그는 기능보유자다. 한때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무형문화재는 되지 못했다. ‘1인 창극’이 문화재 장르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밑에서 배운 제자들 상당수가 무형문화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가 떠나면 병신춤의 무대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평생을 바쳐 예술혼으로 지켜낸 그의 춤사위가 비디오테이프나 사진 기록으로만 볼 수 있는 낡은 추억이 되는 일은 결코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 힘과 용기를 줬던 그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글과 사진·한현묵(전남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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