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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전도사’ 故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한 수필가의 죽음에 많은 언론과 사람들이 왜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5월 9일 57세로 세상을 떠난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이야기다. 장 교수가 신문과 잡지에 오랫동안 글을 써온 필자였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것 같다. 웬만한 종합병원 암 병동의 환자를 위한 서가에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같은 그의 책들이 많이 비치돼 있다는 사실이 작은 힌트가 될까.

그는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전도사였다. 그의 따스하고 아름다운 문장 덕분에 역경을 딛고 일어설 힘과 위로를 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출생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제대로 못쓰는 1급 장애인이었고, 세 차례나 암과 싸우는 시련을 겪었다는 점이 비슷한 처지의, 또는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인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끝이 안 보이는 항암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독자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그가 <조선일보>에 보내온 ‘희망편지’ 칼럼에 쓴 마지막 문장이다. 그는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장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서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받았다.

장 교수의 운명을 바꾼 것은 2001년 하버드대 방문교수로 갔다가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서부터다. 당시 <샘터>에 연재한 글에서 그는 짐짓 암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슬쩍 마무리했다. 그러나 실은 두 차례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고서야 회복했다.

운명은 가혹했다. 2004년 척추로 암이 옮아왔다. 그는 신문에 연재하던 ‘장영희의 문학의 숲’ 칼럼 중단을 알리는 마지막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 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이어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이런 다짐처럼, 그는 오뚝이같이 병마를 이기고 강단에 다시 섰다. 그러나 지난해 암이 간까지 전이되면서 학교를 휴직하고 최근까지 치료를 받아왔다.

그가 ‘불굴의 전사’였던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세 번째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면서 더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지난번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항암제를 처음 맞는 날, 난 무서웠다. ‘아드레마이신’이라는 정식 이름보다 ‘빨간 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항암제. 환자들이 빨간 색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한번 맞으면 눈물도 소변도, 하다못해 땀까지도 빨갛게 나온다는 독한 약. 온몸에 매캐한 화학물질 냄새와 함께 빨간 약이 내 몸에 퍼져 갈 때, 최루탄을 맞은 듯 눈이 따가웠다.”

그는 세 번째 암과 싸우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그 무렵 “ 난 여전히 희망의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 봄을 기다린다”고 글로 썼듯이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장 교수는 가녀린 외모와 달리, 장애인의 정당한 권익을 찾기 위해 실천에 나선 행동가였다. 2001년 하버드대 방문교수 시절, 7층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꼭대기층에 살던 그는 3주 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 아파트를 관리하던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회사를 상대로 싸워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냈다.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장 교수의 스토리를 머리기사로 소개했고, NBC TV와 지역 방송들도 앞다퉈 보도해 5천4백만 미국 장애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지역 사회의 스타로 떠올랐다. 장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장애인 학생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라’고 가르쳐온 내가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떨구게 한 장 교수의 마지막 편지다. 그는 임종 직전 노트북 컴퓨터로 힘겹게 어머니 이길자(82) 여사에게 편지를 남겼다. 어머니는 두 다리를 못 쓰는 둘째 딸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등·하교시켰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면 딸을 학교에 못 데려다주게 될까봐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부숴서 집 앞 골목길에 뿌려놓았다.

유족들은 장 교수가 무기력과 피로 때문에 네 문장짜리 짧은 글을 완성하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의 몇 줄짜리 짤막한 편지는 수백 쪽짜리 소설보다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마음의 빚을 진하게 담았다. 장 교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인 영문학자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장 교수는 임종 직전까지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그는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라고 프롤로그에 썼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나온 유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이틀 만에 초판 3만 부가 팔려나갔다. 그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것이다.

글·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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