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난 12월 9일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초로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46) 씨가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올랐다. 화끈한 공격으로 세계 경량급을 호령했던 ‘짱구’ 장정구 씨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한국 프로복싱사에 한 획을 긋는 쾌거다.
하지만 정작 장정구 씨는 “소식을 듣는 순간 영광스러웠던 순간보다 현역 시절의 고통이 먼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복서의 고독과 고통이 묻어났다. 그는 또한 “개인적으로는 감회가 깊지만 최근 국내 프로복싱이 침체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다”고도 말했다. 지금 한국 프로복싱은 KO 직전 상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가 처음 세계 챔피언에 오를 때도 한국 프로복싱은 위기 상태였다.
1982년 11월 14일 비운의 복서 김득구 선수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WBA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미국)에게 패한 뒤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2주일 후인 11월 28일에는 당시 국내의 유일의 세계챔피언이던 김철호 선수가 KO패당하며 6차 방어에 실패한다.
한국 프로복싱은 이후 1년 7개월 동안 세계챔피언 도전 11연패의 늪에 빠지면서 세계타이틀 무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982년에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이 출범하면서 프로복싱은 국민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만 갔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국내 복서들의 거품을 성토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링 위에 등장한 게 장정구 선수였다. 1983년 3월 26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세계타이틀전. 아직 여드름도 채 가시지 않은 약관 20세의 도전자는 1라운드 시작부터 챔피언 일라리오 사파타(파나마)를 거세게 몰아붙인 끝에 TKO로 세계타이틀을 거머쥐었다. 5년 5개월 동안 세계 최고의 복서로 링을 주름잡은 스타 탄생은 이처럼 드라마틱했다.
42전 38승(17KO) 4패를 기록한 장정구의 전적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밀도를 가지고 있다. 마흔두 번의 경기 중 세계챔피언 출신들과만 열일곱 번 대결을 펼쳤다. 10명의 세계챔피언 출신들을 상대로 열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긴 것은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에서도 최고 기록이다.
아시아 복서에게 인색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장정구만큼은 진짜 챔피언으로 인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미국의 복싱 전문잡지 <링>지에서는 1993년 장정구를 ‘코리안 호크(한국의 매)’로 칭하면서 라이트플라이급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장정구를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장정구는 세계챔피언 출신의 도카시키 가쓰오, 두 차례에 걸쳐 양대 기구(WBA, WBC) 세계챔피언에 오른 오하시 히데유키를 모두 KO로 쓰러뜨렸다. 이나미 마사하루, 구라모치 다다시 등 일본챔피언들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한 일본에서 스카우트한 멕시코 용병복서 헤르만 토레스(세 차례), 프란시스코 몬티엘(두 차례), 에프렌 핀토를 모두 일방적으로 셧아웃시켰다. 전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구시켄 요코(일본)가 가지고 있던 아시아 최다 방어 기록인 13차 방어 기록이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본에서 용병복서를 포함해 수많은 도전자를 급파했지만 장정구 선수는 결국 15차 방어로 구시켄의 기록을 갈아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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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복서 중 최초로 대전료 1억원을 돌파한 주인공 역시 장정구 선수였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5년 연속 프로스포츠 선수 중 최고의 연간 수입을 올린 그는 1986년 4월 13일 열린 9차 방어전에서 1억7백만원을 받아 프로복싱 대전료 1억원 시대를 열었다.
세 번의 방어전을 통해 순수한 대전료만으로 3억9백만원(후원금, 광고료 제외)을 벌어들인 1986년에는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에서도 연봉 1억원을 넘는 선수가 전무했다. 당시 그의 경기를 독점 중계하던 KBS에서는 경기당 1억5천만원 이상의 중계권료를 프로모터에게 지불해야 했다. 프로스포츠의 초창기 시절로 스포츠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던 1980년대 중반 스포츠 스타 장정구의 위상은 지금의 김연아, 박태환, 박지성, 이승엽의 지명도를 상회했다.
장정구는 언제나 해외 원정 방어전을 갈망했지만 열네 번의 방어전을 국내에서 가져야만 했다. 본인의 희망사항과 상관없이 흥행 보증수표이자 프로스포츠계 최고의 블루칩이던 그를 해외로 내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수십만 달러의 대전료를 미끼로 그를 부르는 곳도 없었다.
마지막 방어전이 된 15차 방어전에서 일본 원정의 기회가 왔다. 일본에서 1백50년 만에 하나 나온다는 천재복서 오하시 히데유키 측에서 오퍼를 던진 것이다. 장정구 선수의 11차 방어전 상대로 도전했다 5회 TKO패를 당했던 오하시 히데유키는 절치부심 끝에 재도전장을 내밀었다.
1988년 6월 27일 장정구는 일본 복싱의 성지라고 불리는 도쿄 고라쿠엔홀에서 도전자를 무려 7차례 다운시키며 8회 TKO승으로 15차 방어에 성공한다. 경기 후 “챔피언을 존경한다.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고 토로했던 오하시 히데유키는 나중에 WBC 스트로급 챔피언 최점환과 WBA 미니멈급 챔피언 최희용을 각각 꺾고 두 번이나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15차 방어 후 타이틀을 보유한 채 명예롭게 은퇴를 택했던 장정구 씨는 가정의 불화로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모두 사기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1년 2개월 만에 링으로 컴백했지만 아쉽게도 다시 세계 정상에 오르지는 못한다.
1991년 5월 18일 열린 WBC 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그는 챔피언 무앙차이 키티카셈(태국)에게 5회에 두 번, 11회에 한 번 등 세 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선전했다. 12회만 잘 버텨내면 두 체급의 챔피언벨트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1회까지 채점이 1 대 1 동점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믿을 수 없었지예. 세 번이나 다운시켰는데. 하지만 별수 있습니꺼. 둘 중 하나는 죽자는 심정으로 나갔어예.”
경기는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스코어는 비기고 있었다. 결국 12회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장정구는 경기 종료 22초를 남기고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의 전적에 새겨진 유일한 KO패는 챔피언 장정구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장정구의 경기는 살아 꿈틀대는 용틀임과 같았다. 이기든 지든 끝장을 보던 그의 승부사 기질을 많은 복싱팬들은 사랑했고, 그는 언제나 관중들에게 복싱의 매력을 선사했다. 명예의 전당 입성, 장정구에게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글·황현철(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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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