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꽃샘 추위가 잦아든 3월 13일 오후. 복원과정에서 ‘개발 드라이브 시대’의 잔재라는 비난도 들었던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건물로 들어섰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강만길(74) 위원장을 만나는 길이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빌딩 옆에 걸린 ‘청계11’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학과 학생들에게 상담자로 통하며 차근차근 논리를 펴던 노학자는 목청이 높아진 모습이다. 공직의 길로 들어서면서 언론과 만나는 일을 자제했지만 여론이 ‘아닌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은 두고볼 수 없어서라고 한다.
아호인 여사(黎史)와 얽힌 얘기를 꺼냈다. 아호엔 ‘관(冠)을 쓰지 않아 검은 맨머리를 드러낸 사람, 즉 민중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되겠다’는 다짐이 담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맡고 있는 업무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다.
“대학 들어가 역사를 배우면서 생긴 것입니다. 내 아호에는 그런 뜻도 있지만, 어두움을 끝내고 찾아오는 여명(黎明)이란 말을 되새겨 만든 것이지요.”
강 위원장은 이렇게 운을 뗐다. 6·25 직후 나라가 온통 어둠에 휩싸였을 무렵이어서 이러한 결심을 굳혔다고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최근 불거진 ‘청와대 발언’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아 글쎄, 건배사를 했는데 말이야. 과거사 관련 단체가 여러 개 있잖아요. 청와대에서 함께 오찬을 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과거사 청산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했어요. 알다시피 YS, DJ에 이어 민주정부가 세 번째 들어섰는데 모두 민주주의 발전에 큰 몫을 했지 뭡니까. 그런데 앞선 두 정권에서는 군부 출신과 결탁한 세력이 의회의 과반을 차지해 과거사 청산을 현실화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이제는 군부 안팎의 반민주세력과 야합하지 않은 민주세력이 과반을 확보, 과거사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부각한 게지요. 그래서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얘기였습니다. 지난 3월 7일 청와대에서의 발언도 이런 맥락인데…. 현장에도 없던 일부 언론이 거두절미하고 보도를 해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먹고 살기도 빠듯한 마당에 웬 과거규명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또렷또렷 짚어갔다.
“이 문제는 오늘의, 내일의 우리들 생활에도 계속 따라다니며 영향을 끼치는 것들입니다. 국민들을 괴롭힌 침략자와 타협한 일을 그냥 지나치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지요.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곳은 야만사회입니다. 잘못 됐고, 아픈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는 일이야말로 문화민족으로 가는 길입니다. 외세 침략과 군사정권 독재 등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문화민족은 다들 청산했고, 그렇지 않은 야만민족은 지나쳤습니다.”
일제치하 치고 친일을 하지 않은 국민이 과연 몇이겠느냐며 잣대를 문제로 삼는 사람들도 은연중 있다는 대목에서도 힘주어 말했다. 실례를 상세하게 지목했다. 다른 국민이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귀족, 총독부 중추원 참의원에 올라 일제로부터 연금이나 타먹은 경우, 침략전쟁에 한 핏줄을 동원하는 글을 썼거나 고등경찰 자리나 꿰차고 독립운동을 한 이들을 잡아들이는 등 민족을 괴롭힌 반역 행위자 등이다.

위원장으로 부임해 가장 어려운 작업은 사료(史料)를 철저하게 모으고, 그 후손들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너무나 엄중한 일이어서 기록이 명확해야 하고, 반론권도 들어줘 근거를 남겨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사 선생(고려대 등에서 교수로 지낸 일)을 하면서도 몰랐는데, 여기 와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어요. 친일 문제와 관련한 박사학위 논문이 국내에 2개밖에 없더라고. 그나마 직접적인 게 아니라 반민특위(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특별기구로 설치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논문이었고. 해방 이후 60년이 넘도록 친일행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실적이 없다고 봐야 옳습니다. 교과서에서조차 빠졌어요.”
현재 위원회에 관련 석·박사 44명과 행정인력 등 모두 130명이 연구에 매달리고 있지만, 그래서 규명작업이 쉽잖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기대감만은 저버릴 수 없다. 2005년 부임해 지금껏 하고 있는 작업을 바탕으로 좋은 결실이 잇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위원회 첫해인 2005년 준비작업을 거쳐 지난해엔 친일행위를 한 106명에 대해 중간 보고서를 내놨다. 4년간 한시적으로 운영될 위원회는 2009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총결산함으로써 슬픈 과거사 하나를 청산하는 최종 종합보고서를 국민들 앞에 선보인다.

이번 청와대 발언으로 불거졌지만 위원장 역시 좌파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팔십 평생에 단 한번도 좌익경력에 의해 얽힌 일이 없어요. 굳이 따지자면 개방적 민족주의자 정도로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인가 교포 2세로 일본 가나가와(神奈川)대학에 있는 윤건차 교수가 책을 냈는데, 그 분까지도 나를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분류했지 뭡니까.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봅니다.”
좌파라고 한 근거를 놓고 말이 이어졌다. 저서의 한국전쟁 부분에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거듭되다가 전면전으로 치달은 것이라는 표현이 ‘북한의 침략은 별 게 아닌 것으로 치부’한 대목이라는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파고들었다. “6·25 전쟁을 계속 침략전쟁으로 볼 수도 있고, 통일전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침략전쟁으로 보면 남북 관계는 원한과 복수심만 남게 되지요. 반면 통일전쟁으로 볼 수만 있다면 전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교훈을 보여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부 언론의 시각이 바로잡을 대상입니다.”
노학자는 40년 넘도록 살고 있다는 강북구 수유동 집을 떠나 아침 9시면 사무실로 나온다고 했다. 걷기로 건강을 다진다며 권유도 잊지 않았다. 날마다 한 시간 이상 걷는데 아주 춥거나 시간이 닿지 않으면 아파트 주변이라도 돌아야 속이 시원해진단다.
슬하 1남 2녀 모두가 역사는커녕 인문학도 아닌 이공계를 전공했다고 한다. 후학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군사정권 때에는 자리까지 강제로 내놓아야 했고, 최근처럼 갖가지 고생이 뒤따라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는 싫었던 모양이라고 헛웃음을 쳤다.
“거듭 말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라도 교훈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나에게 언제 눈을 뜨냐고 하는데 나이 80에 가까워도 시력이 아주 좋아요.”
글 송한수 기자 사진 박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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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