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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호>의병장 손자 허블라디슬라브 씨



두번째 3·1절을 맞는 감회가 새롭다. 2006년 특집방송에 출연하고 거리마다 내걸린 태극기의 물결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 다시 떠오른다.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선생의 손자 허블라디슬라브(56) 씨는 지난해 비로소 3·1절을 알게 됐다. 2005년 할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왔고 이듬해 7월 국적을 회복해서 한국인이 됐기 때문이다.

허씨는 1월 9일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의 ‘청소년 독립군사관학교’ 캠프에서 강연을 했다. 전국에서 모인 청소년들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그 후손들이 러시아에서 고려인으로 살아온 경험을 소개했다.

몇 차례 강연을 해봤지만 할아버지 이야기를 고국의 아이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쁘고 즐겁다. 그저 이런 기회를 준 사람들이 고마울 뿐이다. 

고국에 온 지 1년 반이 넘었으나 아직 말이 유창하지 못하다. 그리고 과묵한 성격이어서 질문에 대해 ‘기쁘다’ 또는 ‘고맙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간단한 대답에는 100년에 이르는 현대사의 굴곡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1915년 고국을 떠나 만주, 연해주, 중앙아시아로 떠돌았던 가족사를 돌이켜 보면 그 복잡한 소회를 한 두 마디 말로 담아내기 어렵다. 시작하면 엉킨 실타래를 풀어 나가듯 이야기가 이어지고 또 이어져야 하니까.

허씨는 ‘100년 만의 귀향’이라는 TV다큐를 통해 2005년 8월 처음 알려졌다. 제목처럼 ‘100년’을 빼놓고 그를 이야기 할 수 없다.

1908년 의병장 할아버지가 순국한 후 경북 구미의 일가 후손들은 1915년 짐을 싸서 만주로 떠났다. 만주도 안전하지 않아 허위 선생의 4남 허국 씨는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간신히 일제의 탄압을 피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온 식구가 황량한 중앙아시아에 내팽개쳐졌다. 고려인들이 모여 살던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한 후 1951년 태어난 이가 넷째 아들 블라디슬라브 씨다.







‘100년 만의 귀향’ 2005년 소원 이뤄
블라디슬라브 씨는 오데사 주립대학에서 지질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우크라이나 금광 발굴에 참여하는 등 연구소에서 일하며 러시아 여성과 결혼해 알렉산드르(29), 세르게이(20) 등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구소련연방 해체로 독립한 키르기스스탄의 경제가 형편없이 몰락하면서 직장을 잃고 트럭운전사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고국에 돌아온 블라디슬라브 씨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경기 안성의 (주)비겐의료기에서 일하고 있고 큰 아들 알렉산드르는 며느리와 함께 서울에서 장학생으로 고려대 어학원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왔던 부인과 작은 아들 세르게이는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갔다. 전국에서 선발한 50인의 영재로 뽑혀 전액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니느라 아버지 나라에서의 삶을 미루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가족의 완전한 귀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그는 국적을 회복했으나 아들과 며느리는 ‘외국인’이다. 법적으로 왕산 선생의 핏줄임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이다. 답답하지만 6월쯤이면 모두 끝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정착지원금 등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허씨는 온 가족이 함께 할 날을 꿈꾸고 있다. 한국기업들이 석유 등 자원개발을 위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많이 진출한다는데 이런 기업에서 일한다면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55만 고려인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 등지로 이주해 간 우리의 동포로 그들은 지금 정치적(불법체류)·경제적 어려움과 민족 정체성 혼란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며 “고려인은 분명 우리가 함께 해야 할 한민족”이라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운했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김병훈 기자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1854년 경북 구미에서 출생한 항일 의병장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격분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제가 한국침략을 본격화하자 1907년 경기 북부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의 편성을 주도하고, 군사장으로 두 달여 동안 서울 탈환작전을 펴 동대문 밖 10리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다시 경기 북부로 옮겨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다 일제에 체포됐고 1908년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국했다. 서울 동대문~청량리의 ‘왕산로’는 선생을 기리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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