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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베니스 영화제로 향하던 2005년 여름. 다음 작품에 대한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뱀파이어 영화”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당시 상황을 더듬어 보면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흡혈귀를 의미하는 ‘뱀·파·이·어’라는 네 음절의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블라인드조차 무색케 하는 강렬한 햇빛이 굵은 줄기로 방안에 들이닥쳤다. 빛의 급습과도 같았던 그 시공간의 ‘연출’에 우리 두 사람은 흠칫 놀란 듯 동시에 미간을 찌뿌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 사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란 영화를 한 편 찍었고 드디어 박찬욱 감독은 4년 전 그저 뱀파이어 영화라고만 ‘불친절하게’(?) 설명했던 문제작을 들고 나왔다. 제목은 <박쥐>였다.

<박쥐>의 주인공인 신부이자 뱀파이어인 송강호는 영화의 첫 장면을 열며 “기억은 그분(하나님)의 장기”라는 그럴 듯한 대사를 내뱉는다. 여기서 묻겠다. 감독 박찬욱의 장기는 과연 무엇일까.
 

폭력성? 위트? 의견은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저 ‘깔깔’이 아닌 피식 웃게 만드는 또 무언가가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많아도 일일이 다 기억하는 게 ‘주님의 장기’라던 <박쥐>의 대사를 빌려서 말하자면, 박 감독은 극과 극을 대비시켜 묘한 조합을 만드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올드와 보이, 친절과 불친절, 그리고 이번 작품에선 신부와 뱀파이어, 바로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아이콘들의 이질적인 결합 말이다.

“신부를 조롱하려 한 건 아닙니다. 도리어 신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죠. 신부는 가장 숭고한 휴머니스트예요. 그런 신부가 남의 피를 마셔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도덕적 딜레마는 얼마나 클까를 생각해 그런 설정을 해보았지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파렴치한 악한으로 등장하는 최민식은 비참한 죽음에 앞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어느 때부턴가 대중은 박찬욱 감독에게 완벽함을 요구해왔던 것 같다. 칸 영화제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영화 <올드보이>가 시발점이었다.

<올드보이> 이후 국내 영화계에서는 ‘이쯤은 되어야’라는 기준이 생겨났다.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의 기막힌 반전은 필수였고 관객을 압도하는 ‘때깔’은 기본이었다. 또 해외 빅3로 꼽히는 영화제에서 상 한 개쯤은 받아야 이른바 ‘거장’이라는 반열에 오를까 말까가 된 것이다. 그의 등장 이후 빚어진 일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가 자초하진 않은 일들이다.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 감독은 베니스, 베를린, 그리고 이번 칸 순으로 3대 영화제를 돌며 작품을 선보이는 행운이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역시 칸의 남자였다. 2004년 영화 <올드보이>로 이 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데 이어 올해는 <박쥐>로 본상 가운데 하나인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칸 영화제의 공식 상영 뒤 반응이 뜨거워 수상을 조금은 기대했던 건 사실입니다. 관객들이 진심으로 환호해준 것은 해외 영화제에선 처음이었고 그래서 뿌듯했지요.”

영화를 만들어낸 결과가 트로피와 같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나타난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은 상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제 해외 영화제를 통해 명성을 인정받은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요즘 그에게서 눈에 띄는 점은 연출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박 감독은 영화 <미스 홍당무>에 이어 이번엔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설국열차>의 제작을 맡게 됐다.

“봉 감독이 연출하고 내가 제작하는 첫 작품이 될 것입니다. 할리우드 등의 해외 자본 및 인력과 공동 작업하는 형태가 될 것 같은데… 기대가 큽니다.”

부동의 4번 타자와 떠오르는 거포의 만남. 한국영화의 미래가 밝은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글·허민녕(스포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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