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05년 처음 유럽에 건너갔을 때 한국인으로서 세계 최고 자동차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내가 과연 이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못생긴 차가 옆을 지나가자 현지인들이 ‘꼭 한국차 같다’며 낄낄대는 걸 듣게 됐어요.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때 ‘한국인인 내가 너희들이 자랑하는 벤츠 최고의 디자이너가 돼서 반드시 이 수모를 갚겠다’고 다짐했어요. 이제야 속이 좀 풀리는 기분입니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와 영국 멕라렌이 지난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선보인 SLR 시리즈의 최종판 ‘SLR 스털링 모스’는 한국인의 작품이다. 75대 한정 생산으로 초(超)경량 소재인 카본 파이버로 만든 차체에 650마력의 V8 슈퍼차저를 얹었고 최고시속은 350㎞. 이 75만 유로(13억 5000만 원)짜리 ‘괴물’을 탄생시킨 것은 메르세데스벤츠 독일 본사에 근무 중인 디자이너 윤일헌(35) 씨의 손이었다.
“워낙 유명한 차라서 부담이 컸습니다. 기존의 SLR를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디자인해야 하는 작업이었는데, ‘절대 평범해서는 안 된다’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괴롭혔어요.”
스털링 모스는 현지 전문가들로부터 오리지널 300SLR의 이미지와 현대적 감각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디자인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현재 해외 유명 자동차 회사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한국 출신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고 있다. BMW와 GM, 혼다, 크라이슬러 등이 모두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회사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해외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유학파다. 반면 윤 씨는 보기 드문 ‘순수 국내파’ 디자이너다.

윤 씨는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3년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포드 등 해외 유명 자동차 메이커들에 우편으로 지원서와 함께 직접 만든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윤 씨는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지만, 그만큼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국산차는 저렴한 가격을 장점으로 내세웠는데, 값을 낮추려면 성능보다는 디자인 비용을 줄이기가 더 쉽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능력을 100% 발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주변에서는 “꿈도 야무지다”며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메르세데스벤츠가 덜컥 윤 씨의 입사를 통보해온 것이다. 윤 씨가 처음 일하게 된 곳은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어드밴스드 디자인 스튜디오. 모터쇼 전시를 전제로 제작되는 미래형 차량인 ‘컨셉트카’를 주로 만드는 곳이었다. 입사 6개월 만에 단독으로 수소연료전지를 이용한 컨셉트카를 디자인하라는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윤 씨는 “경력과 상관없이 기회를 주는 점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2005년 10월 도쿄 모터쇼에서 그의 첫 작품인 F600 하이지니어스(Hygenius)가 전시됐다. 하이지니어스는 ‘수소(Hydrogen)’와 ‘천재(Genius)’를 결합한 단어다. 윤 씨의 작품을 본 회사는 그를 곧장 독일 본사로 데려왔다. 이적 후 SLK, GL, S-Class 등 몇몇 메이저 자동차 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윤 씨는 2007년 ‘자동차 디자이너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 스포츠카 SLR 시리즈의 최종판 스털링 모스의 외형 디자인을 맡게 됐다.
1955년 영국의 전설적인 카레이서 스털링 모스는 메르세데스벤츠 300SLR를 몰고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도시 간 레이스 ‘미레밀리아’에서 우승했는데,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를 기리기 위해 SLR 시리즈를 제작해오고 있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윤 씨에게 디자인을 맡긴 차는 카레이서의 이름을 붙인 이 시리즈의 완결판이었다.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된 윤 씨는 2년 동안 20여 차례에 걸쳐 영국과 독일을 오가며 엔지니어들과 스털링 모스의 틀을 조율해 나갔다. 아이디어가 막힐 때면 수시로 오리지널 300SLR가 전시된 ‘벤츠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작업은 원작에 가까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디자인을 먼저 한 뒤 기능을 거기에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전조등 옆의 공기 흡입구와 차체 옆으로 튀어나온 가스 배출구 등 기능상 불필요한 부분까지 모두 재현했다. 윤 씨는 “엔지니어들이 내 디자인이 좋다며 적극적으로 함께 고민해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전시된 스털링 모스는 그렇게 완성됐다.
그는 한국 출신 디자이너에 대한 유럽 자동차 업계의 평가에 대해 “감각적인 면과 생산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 같다”며 “사전 스케치를 제출할 때 다른 디자이너들은 2장 정도 내지만, 한국인들은 6, 7장씩 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세계 유명 자동차 브랜드들이 한꺼번에 BMW의 디자인을 따라했던 적이 있었다. BMW의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이 자동차 디자인의 트렌드를 만들어낸 셈인데, 나도 그런 디자인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걸 이루고 나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윤 씨는 “외국 대학에서는 학기 중에 기업체 인턴 과정을 의무화해서 실무적으로 필요한 부분인지를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며 “기회가 된다면 실무경험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가 대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글·장상진 조선일보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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