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일반 학교 영어선생님 된 1급 시각장애인 김헌용



 

교문 앞에 도착해 전화를 하자 몇 분 후 운동장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손에 든 지팡이만 아니었다면 사물을 전혀 분간할 수 없는 1급 시각장애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바로 걸어왔다.

거침없는 일직선 행보. 그의 삶도 그래왔다. 일반인과 똑같이 경쟁하며 공부했고, 교사 임용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제 그는 일반 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 서초구 경원중학교 영어담당 김헌용(24) 교사. 시각장애인으로 특수교육과가 아닌 일반 교과 교사가 된 것은 서울시에서 그가 처음이다. 전국 1호 시각장애인 일반 교사는 2007년 충남교육청에서 임용된 최유림(27) 교사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 낯선 환경을 접하면 일반인보다 적응 시간이 더 걸리게 마련이지만, 이제 1층 교무실부터 건물 반대편 4층 시청각실까지 혼자 찾아갈 만큼 학교 건물도 익혔다. 은평구의 집에서 잠원동 학교까지도 혼자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학교의 배려로 각 교실을 찾아다니는 대신 시청각실에서만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조교사가 함께 들어와 교재 배포 등을 도와주시고요. 칠판에 판서를 하지 않고 컴퓨터로 교재를 준비해서 빔 프로젝트로 쏘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치고 있지요.”
 

물론 수업 준비는 쉽지 않다. 교재를 파악하는 일부터 그렇다. 김 교사는 문서를 음성으로 전환해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교과서에 실린 문장을 쪽수와 함께 모두 암기했다. 시각장애 사회복지관의 도움으로 교재에 실린 그림의 설명까지 모두 컴퓨터에 입력해 외워뒀다. 김 교사의 성실한 수업 준비와 영어실력에 감탄한 학생들의 반응은 뜨겁다.

그는 1991년 다섯 살 때 정확히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오른쪽 눈부터 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어딘가에 부딪힌 충격 때문인 것으로 짐작한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들의 손을 잡고 독일까지 날아가 치료를 시도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 이미 책을 읽을 수 없는지경이 됐다. 결국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서울 신교동의 국립맹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학교 근처로 집을 옮겼다. 그래도 그때까진 사물을 구분할 정도는 됐기에 혼자 걸어서 등교했으나 남아 있던 시력마저 점차 잃게 됐다. 그는 “워낙 어려서 실명을 한 탓인지, 시각장애가 그리 큰 역경으로 여겨지진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절망했다. 그런 그에게 살아갈 힘을 불러일으켜준 것은 영어 공부였다.

“중학교 때 영어를 가르치신 담임선생님의 각별한 관심과 격려로 영어에 빠져들게 됐어요. 영국 축구팀을 좋아해서 BBC 방송으로 축구 중계를 즐겨 들은 것도 영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됐고요.”

그는 남들이 보기엔 불리한 자신의 조건이 영어를 공부하는 데는 오히려 약이 됐다고 생각한다. 맹학교의 특성상 한 반의 학생 수가 열 명 이하였기에 선생님들의 관심을 더 많이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고, 다른 과목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어를 좋아하게 만들어준 담임선생님은 이후 교직을 그만뒀지만, 지금도 그와 수시로 연락하며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때로는 우수한 실력의 자원봉사 교사들이 방문해 일대일로 영어 과외도 해주셨지요. 그래서 학원을 따로 다닐 필요가 없었어요. 아마 제가 맹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웬만한 고액과외나 유명학원보다 훨씬 알찼을 겁니다.”

웃으며 말하는 김 교사에게서 장애라는 조건을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여긴 낙관과 긍정이 배어났다. 훌륭한 선생님들을 접하며 교사의 꿈을 키우게 된 그는 2006년 충남 국립공주대 사범대 특수교육과에 입학해 부전공으로 영어교육을 택했다.

“영어 공부에 필요한 교재는 점자책을 찾기 힘들 뿐 아니라 일반 서적을 점자로 옮기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주로 교재를 음성으로 녹음해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녹음작업을 공주대 사대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2004년과 2006년에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매진한 결과 그는 영어공인인증시험김헌용 씨는 책을 음성으로 녹음해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해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연수도 다녀왔고, 영어공인인증시험에서도

토익 9백75점, 텝스 9백18점을 받았다. 에서 토익(TOEIC) 9백75점, 텝스(TEPS) 9백18점을 받았다. 특수학교 교사가 아닌 일반 교원 임용에 도전할 욕심이 생겼다. 대학 4학년 때 공주사대 부속 중학교에서 한 교생실습은 시각장애인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해준 동시에, 교사로서의 꿈을 더욱 확고히 다진 계기였다. 중등교사 임용시험도 교재를 음성으로 녹음해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준비했다.

“주변의 우려를 모르지 않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일반 학생을 ‘못 가르치기 때문에 안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직까지 ‘가르쳐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못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 편견을 깰 것입니다.”
 

학생들은 교사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열정과 관심을 갖고 가르치는지, 주변에서 지켜보는 어른들보다 훨씬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그는 믿는다. 교사가 열정을 갖고 노력하면 아이들은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한다. 영어를 잘 가르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 믿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것을. 아이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상담 공부도 시작할 계획이다.

“어쩌면 학생들에게는 시각장애인 선생님에게서 수업을 받아본 경험 자체가 훗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작으나마 자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봅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직접 슬라이드 교재를 준비하고, 교과서를 그림 내용까지 통째로 외워서 설명하는 선생님의 모습. 그런 선생님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학생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값진 배움을 얻고 있지 않을까.
 

글·김정희 객원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