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서울의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서는 길은 마치 현재에서 과거의 역사로 넘어가는 타임머신 같다. 지난 9월 17일 청명한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리는 고궁으로 도심 속 시간여행을 떠난 이들은 여성문화유산연구회가 운영하는 ‘여성문화재 지킴이 스토리텔러’과정 수강생 36명과 해설사 4명이다.
“그동안 역사의 기록은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담당했던 남성들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여성들은 그 이면에 존재감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숨어 있던 역사 속 여성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역사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찾고자 합니다.”
힘과 권력을 쥔 남성 위주의 역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내어 역사관을 재정립하는 것이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창립 취지라고 최선경(44) 회장(<왕을 낳은 후궁들> 저자)은 설명한다.
이날 고궁 답사의 테마는 ‘왕실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다. 경복궁 왼편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을 돌아보는 순서가 먼저다.
박물관 내 탄생교육실에서는 조선왕실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했던 출산과 교육을 살펴볼 수 있다.
“출산 예정 3개월 전부터 궁궐의 관원들이 비상근무에 들어갔어요. 길일을 택해 해산 날짜를 잡고 좋은 자리와 방향을 정해 산실을 마련했는데, 출산하는 자리에는 사슴 가죽, 짚 멍석, 기름종이 등을 5겹으로 깔고 산모의 베개는 다람쥐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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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향(56) 문화유산해설사는 탯줄 관리에 대한 비화도 들려준다. 생명의 시작인 탯줄이 아이의 장수와 복, 나아가 왕조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믿어 탯줄 관리는 중요한 국가 행사의 하나였다. 출생아의 태반을 정성스럽게 도자기(태 항아리)에 담아 좋은 기운이 있는 곳(태실)에 탑을 세우고 그 아래 묻어 무병장수의 기운을 받도록 기원했다.
박물관을 나와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을 둘러보며 최선경 회장이 교태전의 안주인들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태전의 첫 주인은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였죠. 교태전은 왕비의 공간이면서도 실제로 이곳을 사용한 왕비는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가 가장 오랫동안 교태전의 주인으로 머물렀습니다.
특히 세조는 여기서 정희왕후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집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정희왕후는 이곳에서 세조와 함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한 후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누린 왕비였습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는 2003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주관한 여성문화유산해설사 양성과정에 참가했던 여성들이 만든 동아리에서 비롯됐다. 이후 연구회는 7년째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알리고 여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문화유산 해설을 연구하며, 여성문화재 지킴이 스토리텔러를 양성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회는 올해 상반기에 역사 속 여성인물을 찾아가는 일명 ‘너울길 답사’로 강원 강릉시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전북 부안군의 이매창 등의 발자취를 따라갔고, 하반기에는 전북 장수군의 논개, 강원 원주시의 임윤지당(조선 후기 성리학자)과 작가 박경리 코스를 답사하고 있다.
또 매월 둘째 금요일에는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출가 후 남편을 일찍 잃은 왕실 여성들이 여생을 보낸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정업원(淨業院)을 찾아가는 시간도 마련하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걷기 답사는 고구려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아차산성길, 고양 행주산성을 둘러보는 덕양산길, 수종사와 운길산을 찾아가는 남양주 기차 여행 등이다. 참가자들은 여성문화유산연구회 인터넷 카페에서 역사 속 여성인물과 지역별 여성문화유산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여성에 대한 기록은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별로 없고, 있다 해도 번역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미개척 분야입니다.”
TV 드라마에서는 선덕여왕이나 장희빈 같은 역사 속 여성의 이야기가 인기를 끌지만 정작 우리 문화유산 가운데 여성의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홍영혜(49) 문화유산해설사는 “역사 속 여성 찾기는 남성 인물 중심으로 서술된 기록 중 여기저기에서 한 조각씩 찾아내어 퍼즐 맞추기를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가야 할 길은 멀지만, 공감대를 지닌 여성들끼리 어깨를 겯고 가는 길이라 힘이 난다.
이날 해설을 들은 여성문화재 지킴이 스토리텔러 과정 수강생 문혜경(45) 씨는 “그동안 고궁에서 문화유산 해설을 여러 번 들었지만, 왕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문화해설은 처음”이라며 “우리 문화유산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글·오진영 객원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여성문화유산연구회 cafe.naver.com/gender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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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