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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K-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딴죽걸기

10월 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한 제27회 반도체대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SK하이닉스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뉴시스

질주하는 K-반도체를 논하는 것은 자칫 뒷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도 이 글이 안일한 선택지로 향하는 이유는 K-반도체가 유례없는 ‘더블 슈퍼사이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업황 회복이라는 첫 번째 호황과 인공지능(AI) 혁신이 촉발한 산업구조 전환이란 두 번째 상승 곡선이 겹치며 K-반도체는 단순 호황을 넘어 놓치면 다시 오기 어려운 변곡점을 마주했습니다.
이 같은 흐름은 숫자로도 증명됩니다. 시장조사 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AI 가속기 확보,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에 힘입어 전 세계 메모리 시장 매출은 2024년 한 해에만 70% 넘게 성장했고 고대역폭메모리(HBM)·그래픽처리장치(GPU)·첨단 패키징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2025년 11월 한국 반도체 수출은 172억 6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최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덕분에 삼성전자의 DS부문과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냈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금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AI 패권을 쥐기 위한 빅테크들의 혈투가 치열할수록 K-반도체는 수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엔비디아의 GPU 기반 AI 칩과 구글·아마존 등 빅테크가 직접 만드는 주문형 반도체(ASIC), 어느 진영이든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반도체 전문 분석 기관인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내년 ASIC 제품에 공급되는 메모리 수요는 올해보다 62.5% 늘고 GPU 제품의 메모리 수요 역시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HBM 시장의 호재가 D램 가격을 끌어올리는 연쇄 효과도 한국에 유리합니다.

위기론과 대망론, 역사는 반복될까
하지만 낙관이 커질수록 이유 있는 그림자 역시 짙어집니다. 반도체 산업은 수년 주기로 ‘가격 하락-재고 축적-감산-반등’을 반복해왔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반도체 위기론’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번 슈퍼사이클 역시 부침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 월가에서 퍼지는 AI 거품론은 투자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영화 ‘빅쇼트’의 실제 인물로 유명한 공매도 투자자 마이클 버리는 AI 관련 빅테크들이 서로 투자와 기술·제품을 주고받는 순환거래를 ‘매출 돌려막기’로 규정한 바 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리사 쿡 이사는 자산가격 고평가에 경고를 날리기도 했습니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K-반도체의 메모리 편중 구조입니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75%를 차지하는 로직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 점유율은 3%대에 그칩니다. 대표적인 로직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의 시가총액은 약 1700조 원(37조 800억 대만달러, 12월 2일 기준)에 이르는데 이는 삼성전자(676조 원)와 SK하이닉스(391조 원)를 합친 것보다 훨씬 큰 수준입니다. 불과 5년 전인 2020년만 해도 TSMC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엇비슷한 수준이었음을 떠올리면 반도체 산업 성장의 단물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메모리 시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가격 우위로 경쟁자를 배제하는 치킨게임 시장이기도 합니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시장 지배력을 담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범용 메모리 시장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와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 등 중국 기업들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K-반도체를 턱밑까지 추격해온 형국입니다.

루프에서 탈출하기 위한 변화
호황과 불황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K-반도체 사이클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메모리 강자·로직 약자라는 구조를 넘어서야 합니다. ‘설계(팹리스)-제조(파운드리)-후공정(패키징 및 테스트)’에 이르는 로직 반도체 생태계를 육성하는 데 더해 장악해야 하죠. 변화의 조짐은 민·관 양쪽에서 관측됩니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 지원 규모를 늘리고 산업 강화 전략을 법제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액션 플랜도 나왔습니다. 12월 5일 이재명 대통령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르네 하스 ARM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ARM 스쿨’을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ARM이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설계 자산과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 글로벌 수준의 설계 인력 1400여 명을 양성한다는 계획입니다.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비서관은 이번 협력에 대해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내 팹리스 및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메타의 인수를 거부한 것으로 화제가 된 퓨리오사AI와 리베리온 등 우리나라의 AI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은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의 유니콘으로 거듭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ASIC의 부상과 함께 이들의 반도체 설계를 돕는 디자인하우스의 중요성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국내 디자인하우스로는 세미파이브, 에이직랜드, 가온칩스, 에이디테크놀로지 등이 유망 기업으로 꼽힙니다. 다만 글로벌 기업에 비해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두드리고 있습니다.
K-반도체의 두 기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전략은 전 공정을 내재화한 통합 생태계 구축입니다. 송재혁 삼성전자 최고기술책임자는 10월 열린 반도체대전에서 “D램, 낸드, 로직, 패키지 등 모든 영역에서 기술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전 영역을 보유한 유일한 회사로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종합 AI 솔루션 전략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내년 가동 예정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의 공장도 삼성 파운드리 부활과 통합 생태계 전략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미국의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흐름과도 부합하는 지정학적 자산으로서의 가치도 큽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10월 31일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면담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블랙홀’ 벗어날 골든타임
일찌감치 HBM과 더블데이터레이트5(DDR5) 등 AI 관련 제품에 자원을 집중해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을 끌어올린 SK하이닉스는 TSMC·한미반도체 등 외부 생태계와의 개방형 협업을 통해 메모리 왕좌를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자체적으로도 AI 기반 스마트 팩토리 시스템을 전 공정에 도입하고 SKC의 반도체 후공정 사업을 강화해 그룹 내 시너지를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하이닉스가 HBM의 압도적 우위와 협업의 시너지로 메모리 초격차를 공고히 지키는 ‘방패(盾)’라면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부활과 통합 생태계 구축으로 신 시장을 개척하는 ‘창(矛)’입니다. 창과 방패가 함께 작동할 때 K-반도체는 구조적 모순(矛盾)을 깨고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1993년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는 주인공이 2월 2일이 무한히 반복되는 루프에 빠지게 됩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막힌 세계 속에서 주인공은 절차탁마해 자신을 바꾸기 시작하고 이윽고 사랑을 쟁취하며 지긋지긋한 루프를 탈출합니다. AI·반도체의 더블 슈퍼사이클은 K-반도체가 그동안 갇혀 있던 ‘업황의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자 한국 기간산업의 구조적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 골든타임입니다.

홍성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간지 기자. ‘걸어다니는 잡학사전’으로 불리며 책 ‘그거 사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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