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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공식 협찬사 부창제과 이경원 대표
1963년 경북 경주시의 한 골목 안. 전통 과자와 센베이를 굽는 작은 제과점에서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냄새를 따라 줄을 선 마을 사람들 손엔 따끈한 호두과자 한 봉지씩이 쥐어졌다. 그렇게 30년 넘게 경주의 간식을 담당했던 ‘부창제과’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진 못했다. 대기업 제과점들이 등장하면서 1990년대 말 작은 가게의 불빛은 서서히 꺼졌다. 유행은 바뀌었고 골목의 고소한 냄새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그 냄새가 다시 퍼지고 있다. 이번에는 세계 무대에서다. 부창제과가 만드는 호두과자가 10월 말 경주에서 개막하는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 식탁에 오른다. 경주의 오래된 호두과자가 K-디저트로 부활하는 순간이다.
부창제과의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 사람은 권원갑 창업주의 외손주, 이경원(35) 대표다. 그는 고향집에서 발견한 한 장의 흑백사진을 보고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1960년대 부창제과 간판 앞에 서 있는 외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빛바랜 사진을 보며 언젠가 그 이름을 살리겠다고 다짐했다.
2024년 이 대표는 전통 호두과자에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팥앙금이 들어간 기본 제품부터 말차·고구마·완두·인절미 등 다채로운 앙금을 활용한 호두과자를 개발했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 소금 산지인 볼리비아 우유니염지의 소금을 넣은 ‘우유니 소금 호두과자’는 출시 6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1억 개를 돌파했다. 부창제과는 7월 말 인천 송도에서 열린 APEC 제3차 고위관리회의(SOM3)에 공식 협찬사로 참여했으며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되는 APEC 재무·구조개혁장관회의에서도 호두과자를 선보인다.
이 대표는 ‘한국적인 본질 위에 작은 변주를 얹는다’는 철학으로 제품을 만든다. APEC 2025 KOREA 공식 협찬사로 선정된 이후 더욱 주목받고 있는 그에게 K-디저트를 통해 세계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창제과가 APEC의 공식 협찬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세계적인 국가 행사에 우리가 만든 호두과자를 선보일 수 있다니 정말 뜻깊게 느껴졌습니다. 정부가 K-컬처와 K-푸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는데 부창제과가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죠. 청년기업으로서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고 APEC이 성공적으로 치러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의 디저트가 세계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외국인에게 호두과자는 익숙하지 않은 디저트일 텐데요.
호두과자에 들어가는 팥, 고구마, 완두는 모두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들이에요. 그만큼 한국 식재료가 얼마나 다양하고 풍요로운지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APEC 고위관리회의에서 우유니 소금과 완두 메뉴를 선보였는데 한 번 맛본 외국인 손님들이 계속 부스를 찾아오더라고요. 이번 정상회의 기간에는 메뉴를 더 다양화하고 무엇보다 현장에서 바로 구워 제공할 예정입니다. 갓 구워낸 호두과자는 정말 맛있죠(웃음).
APEC 참가자들에게 호두과자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한국 디저트가 외국인들에게 알려진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0여 년 전 처음 창업할 때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적어둔 메모가 있더라고요. 그땐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지금은 방탄소년단(BTS), 드라마 ‘오징어 게임’,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는 시대가 됐잖아요. 그 흐름 속에서 우리 호두과자도 한국의 문화와 감성을 전하는 K-디저트로 자리매김하면 좋겠습니다.
APEC을 알리는 ‘스마일경주 캠페인’도 직접 기획했다고요.
공식 협찬사로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따뜻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외국인에게 먼저 웃어 보이자’는 단순한 메시지지만 그 미소 하나로도 한국의 정을 전할 수 있다고 믿어요. 민간 차원에서 자유롭고 유연한 방식으로 홍보를 펼치고 싶었고 지금은 여러 유명 인사가 동참하면서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캠페인이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APEC을 홍보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이 있나요?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APEC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스페셜 패키지 호두과자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뮷즈(국립중앙박물관 브랜드 상품)와 부창제과, APEC 로고가 들어간 패키지예요. 방문객들이 기념품처럼 호두과자를 즐기며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창제과는 APEC을 계기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으며 K-디저트 브랜드로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대표는 해외시장 진출과 함께 브랜드의 뿌리인 경주에서 지역과의 상생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여정이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를 잇는 또 다른 도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한국 디저트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대표님이 정의하는 K-디저트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한국에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즐겨온 음식이야말로 진짜 K-디저트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먹어온 것, 우리 입맛 속에 자리 잡은 것이 결국 정체성이니까요. 그런 음식이 한국의 이름으로 세계 무대에 서야 진짜 의미가 있죠. 도넛이나 베이글, 에그타르트처럼 서양에서 온 디저트가 아니라 본질이 한국적인 음식.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K-디저트입니다. 다만 너무 한국적인 것을 그대로만 내세우면 한계가 있다고 봐요. 한국적인 뿌리 위에 색다른 재료나 감각을 입혔을 때 세계인들에게 더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거든요. 그 ‘작은 변주’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호두과자 앙금을 다양화했습니다.
전통과 새로움의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열 개 중 여덟 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본질을 지키는 일이고요. 리브랜딩 초기부터 전체적인 디자인 콘셉트는 전통적인 감성을 강조했습니다. 대신 제품에서만큼은 작은 포인트를 줬어요. 너무 퓨전으로 가면 본질을 잃기 때문에 전통 속에서 미묘한 변화를 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해외시장 진출 계획도 궁금합니다.
내년 상반기에 일본 주요 쇼핑몰과 백화점에 입점을 앞두고 있습니다. 일본 시장은 디저트 문화가 발달해 있지만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형태는 거의 없더라고요. 대부분 완제품을 진열해두는 방식을 보면서 호두과자는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갓 구워낸 호두과자는 냄새 자체가 하나의 매력이고 그 향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거든요. 게다가 호두과자는 일본 사람들의 입맛에도 잘 맞아요. 이미 부창제과에 일본인 고객층이 꽤 많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굽는 형태로 선보이면 충분히 통할 거라 생각합니다.
부창제과의 문양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자두꽃)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오얏꽃은 예로부터 품격과 권위, 정통성을 상징합니다. 저희는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브랜드 정신에 담았어요. 1960년대에 시작된 브랜드로서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 그리고 오얏꽃이 봄에 피는 꽃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뜻하기도 합니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디자인은 부창제과를 통해 희망이 널리 퍼져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함께 풍요로워지길 바랐던 창립자의 뜻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부창제과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까지 수도권 주요 매장에서 브랜드를 알리고 성장해온 것은 결국 경주와 함께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이름으로 다시 경주에 뿌리내릴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매장을 하나 더 여는 것이 아니라 경주의 자부심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부창제과학교’ 설립도 준비 중입니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브랜드로 나아가기 위한 실질적인 발판이 될 거예요. 그 마음의 중심에는 경주를 향한 애정이 있습니다.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경주를 다시 바라보게 됐어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경주는 자연과 유적, 문화재 하나하나가 한국의 정체성을 품고 있죠. 그 속에서 저희 호두과자와 K-푸드를 맛보며 한국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한국 문화의 확장이자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