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음악방송 월드투어 14년 K-팝으로 세계를 묶다 “엄격한 국내시장이 글로벌 경쟁력 키워”

‘뮤직뱅크 월드투어’ 김상미 CP
“좀 다른 Spicy, 청양고추 Vibe.”
2025년 10월 유럽 대륙의 가장 서쪽, 포르투갈 리스본의 밤하늘에 한국어 가사가 울려 퍼졌다. 그룹 에이티즈(ATEEZ)의 무대. 객석을 가득 메운 외국인 관객들이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객석 곳곳에서 형형색색 응원봉이 흔들리고 “에이티즈”를 외치는 함성이 파도처럼 번진다. K-팝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이들도 눈에 띈다. ‘2025 뮤직뱅크 월드투어 인 리스본(Musicbank World Tour in Lisbon)’이 열린 날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5시간 떨어진 이곳에서 K-팝은 더 이상 ‘외국 음악’이 아니다.
KBS2 음악 프로그램 ‘뮤직뱅크’의 글로벌 확장판인 뮤직뱅크 월드투어(이하 ‘뮤뱅 투어’)는 2011년부터 14년 동안 계속돼 오고 있다.
공연장 섭외와 현지 프로모터(공연 주최사) 검증, 출연 가수 조율, 방송용 무대 설계, 국가별 문화에 대한 고려까지. 화려한 무대 뒤에는 수많은 판단과 책임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 과정을 총괄해 온 인물이 김상미 CP다. 그는 2003년 KBS에 입사해 ‘올드미스 다이어리’, ‘자유선언 토요일’, ‘개그콘서트’ 등의 연출을 맡아왔으며 2016년 뮤뱅 투어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지금이야 K-팝이 해외 스타디움을 채우는 풍경이 익숙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뮤뱅 투어가 출발할 때만 해도 K-팝의 해외 활동은 일부 인기 가수의 일본 진출에 머물러 있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2012)이 세계를 강타하기 전이었다. K-팝 가수가 전 세계 팬을 찾아나서는 시도는 선례가 거의 없었다.
불확실성 속에서 시작된 뮤뱅 투어는 2011년 일본 도쿄돔부터 2025년 12월 도쿄 국립경기장까지 14개국에서 20회 공연을 이어왔다. 코로나19로 잠시 멈춘 시간을 제외하면 쉼 없이 달려온 여정이다. 글로벌 통합 관객수는 약 37만 명에 이른다.

도쿄돔에서의 첫 도전
2011년 첫 도쿄돔 공연은 당시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월드투어에 대해 반신반의했어요.(웃음)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랑 카라가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고 했지만 그 규모를 체감하기는 어려웠어요. 티켓 판매가 어떻게 될지 끝까지 예측할 수 없었죠.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KBS가 책임지고 가보자는 판단을 했어요. 톱스타만 설 수 있다는 도쿄돔에서 음악방송을 연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우려와는 달리 그날 도쿄돔 4만 5000석은 가득 찼다. 뮤뱅 투어는 첫 공연을 시작으로 아시아를 넘어 칠레·베를린(독일)·파리(프랑스)·멕시코 등으로 무대를 넓혀갔다. 뮤뱅 투어는 일반 콘서트와 다르다. 음악방송이기 때문에 중계차가 따라붙고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설치된다. 음향과 조명 역시 방송 기준에 맞춰 다시 설계된다. 일반 콘서트에서는 객석을 어둡게 하지만 음악방송에서는 객석 또한 화면의 일부다. 환호하는 표정과 응원봉의 물결까지 담아야 한다. 김 CP는 “음악방송이라는 포맷은 장점이자 부담”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한국 방송 브랜드의 신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진만 40~50명, 여기에 현지 인력이 더해진다. 이 때문에 방송 화면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한국 방송이 인물 위 공간을 여유 있게 두는 화면 구성을 기본으로 삼는다면 프랑스에서는 얼굴을 타이트하게 잡는다. 이마가 화면 밖으로 잘려 나가는 구도도 낯설지 않다.
관객이 달라졌다
초창기 과제는 ‘사람’이었다. 믿을 만한 현지 프로모터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공연은 변수가 많아서 계산처럼 돌아가지 않아요. 게다가 여러 팀이 함께 오르는 무대이다 보니 대형 프로모터 입장에서는 매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거죠. 티켓 판매 플랫폼 계약부터 홍보 전략, 무대 설치업체 선정까지 일일이 검증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라인업’을 완성하는 일이 더 어렵다. K-팝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면서 가수들의 해외 일정이 빼곡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뮤뱅 투어 20회 공연 동안 단 한 번도 취소한 적은 없다. 2024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으로 예정된 스페인 마드리드 공연이 현지 사정으로 취소 통보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진은 곧바로 대체 공연장을 수소문해 공연을 강행했다.
“공연장 확보는 프로모터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공연을 취소해도 손해는 없었어요. 하지만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가수들도 팬들을 위해 꼭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고요. ‘뮤뱅 투어는 온다고 하면 온다’는 이미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비까지 내린 공설운동장에서의 공연은 그래서 더 각별했다.
투어의 기준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네트워크가 탄탄한 ‘안전한 선택’이 먼저였다면, 이제는 K-팝 가수가 단독으로 가보지 못한 도시를 먼저 찾는다. 가수들이 현지 시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2018년 그룹 샤이니의 멤버 태민은 뮤뱅 투어를 통해 처음으로 칠레에서 솔로 무대를 선보였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전용 응원봉이 객석을 가득 메웠고 그 경험은 이듬해 남미 투어로 이어졌다. 이렇듯 뮤뱅 투어는 K-팝 팬을 위한 축제인 동시에 K-팝 가수에게는 시장성을 시험하는 무대가 됐다.
관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특정 그룹을 응원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던 팬 중심 문화에서 이제는 ‘K-팝’이라는 장르 자체를 즐기기 위해 오는 관객이 늘었다. 그는 “이제 외국인 관객들이 오프닝 무대부터 마지막 곡까지 한국어 발음으로 따라 부르는 모습은 놀랍지도 않다”고 말했다.
국가별 반응도 흥미롭다. 칠레와 멕시코에서는 스탠딩 구역에서도 무대 앞으로 몰려들기보다 공간을 확보해 춤을 추며 공연을 즐긴다. 반면 일본 공연은 비교적 조용하다. “공연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가 옆 사람에게 방해될까봐 조심하는 거였어요. 요즘은 일본도 점점 더 표현을 많이 하더라고요. K-팝 팬 문화가 하나로 모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진화하는 K-팝 정의
그가 무대의 완성도만큼이나 신경 쓰는 것은 관객이 좋은 기억을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칠레 공연 당시 이틀 전부터 호텔 앞을 지키던 팬들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인만 지나가도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그들을 위해 “매번 모두가 만족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메인 스테이지 외에도 무빙 스테이지나 브리지(객석 쪽으로 길처럼 뻗은 통로), C스테이지(객석 가까이에 별도로 설치된 무대)를 설치해 가수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한다. 방송에 모두 담기지는 않지만 현장 이벤트도 계속돼 왔다. 도시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해 현지 언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지역적 상징성을 무대에 녹여낸다. 2012년 칠레 공연에서 정용화(밴드 씨엔블루 리더)는 광산 사고 생환 광부들을 위한 곡을 선보였고, 2024년 마드리드 공연에서는 아이돌 그룹 엔믹스가 스페인어 버전 무대를 준비했다. 장원영(걸그룹 아이브 멤버)은 2025년 리스본 공연에서 관객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거는 이벤트를 선물했다. 물론 문화적·제도적 제약이 있는 지역에서는 의상과 연출에 제한이 따르기도 한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 역시 제작의 일부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큰 반응을 얻는 K-팝 가수도 늘고 있다. 김 CP는 그 이유로 K-팝 특유의 정서적 메시지를 꼽았다. “K-팝이 반복해 온 ‘할 수 있다’, ‘포기하지 않는다’와 같은 서사가 해외시장에서는 신선하게 읽히는 것 같아요. 사랑이나 일탈을 중심으로 한 서구 팝 음악과는 결이 다른 에너지, 밝고 단단한 태도가 세계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거죠.”
그는 또 다른 배경으로 한국 콘텐츠 소비자의 높은 눈높이를 들었다. 스토리, 퍼포먼스, 완성도 면에서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K-콘텐츠가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20년 넘게 예능 방송을 연출해 온 그는 “요즘 콘텐츠의 힘은 ‘날것’에 있다”고 말했다. 스포츠 예능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연출하는 대신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캐릭터의 관계성이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날것의 매력’을 앞으로 어떤 형태로 방송에 녹여낼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콘텐츠가 끊임없이 변화해 온 것처럼 K-팝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김 CP는 K-팝의 세계적 흥행을 ‘확장’으로 설명했다. “1, 2기에는 일본 진출이 중심이었다면, 3기에는 해외 작곡가와 협업하며 음악적 외연을 넓혔어요. 이제는 또 다른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이브재팬의 ‘엔팀’, 한미 합작 걸그룹 ‘캣츠아이’, JYP재팬 소속 ‘니쥬’처럼 현지에서 선발하고 제작한 팀들이 K-팝 시스템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만든 아이돌이 K-팝이었다면, 이제는 제작 구조와 작동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리스본의 밤을 채운 한국어 가사처럼, K-팝은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일상언어가 되고 있다.
이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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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