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그 누구도 서점에서는 외롭지 않아요”

북샵 The Bookshop
기본정보를 보자마자 해본 적 없던 질문이 떠오른다. 책방 배경 영화나 소설은 왜 ‘영국산’이 많은가. 왜 ‘영국 배경’이 다수인가. 고작 영화 ‘노팅 힐’, ‘84번가의 연인’을 앞세운 궁금증인데, 인공지능(AI) 역시 ‘영국산’이 압도적이라고 말한다. 왜인가. 런던 ‘차링 크로스 로드(Charing Cross Road)’ 같은 고서가 거리를 상징적인 예로 든다. 마을 전체가 책방마을이라는 웨일스 ‘헤이온와이(Hay-on-Wye)’도 ‘영국’과 ‘서점’의 친밀도를 증명(?)한다고 한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씨라 차담과 독서 문화가 정착된 나라인 것도 이유다. 마지막으로 대문호가 많았던 ‘영국 문학’의 힘이 영향을 주지 않았겠냐고 한다. 미덥지 않지만 AI의 마지막 분석에 좀 더 기대며 재생버튼을 눌렀다.
플로렌스 그린 부인(에밀리 모티머 분)은 16년 전 남편을 잃었다. 어느 날 그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하드버러를 여행하다가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책방을 차리기로 한다. 남편을 처음 만나 사랑이 싹튼 곳이 런던의 한 서점이었다.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그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그만한 게 없었던 것. 은행 빚을 내어 지붕이 부서지고 쥐가 들끓는 폐가를 구한다.
하지만 모든 게 녹록지 않다. 마을에 뿌리내리려는 이방인을 달가워하는 이가 없다. 겉으론 친절하게 독려하는 듯하지만 뭔가 마뜩지 않은 듯 수근거리는 주민들. 가장 큰 걸림돌은 지역 토호인 바이올렛(패트리시아 클락슨 분)이다. 퇴역 장군의 아내로 ‘가맛 부인’으로 불리는 이 여인은 돈과 권력, 인맥의 상징인 인물. 7년째 비어 있던 집을 뒤늦게 문화센터로 만들겠다는 핑계를 댄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사건건 플로렌스를 방해하는 바이올렛. 마을사람들은 허세 가득 찬 바이올렛의 눈치를 보며 관망할 뿐이다. ‘가맛’은 세상이 알아주는 ‘돈’ 많고 ‘빽’ 좋은 귀족 아닌가. 권력의 그늘 밑에선 따뜻한 연대란 없다.
플로렌스는 그래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서점을 오픈하고 마을 소녀 크리스틴(오너 니프시 분)을 조수로 고용한다. ‘올드하우스 북샵’. 그녀의 단단한 용기가 간판 위에 당당히 새겨진다.
외진 마을에 책을 사서 읽을 사람은 없다. 마을의 가장 큰 집에 칩거하는 노신사 ‘브런디시’(빌 나이 분)가 유일한 예상 독자. 하지만 걱정과 달리 책방을 찾는 이들이 제법 많아진다. 아내 없이 혼자 사는 침묵의 신사 브런디시도 플로렌스에게 책을 주문하고 조언을 주기 시작한다.
플로렌스는 보수적인 항구마을 사람들이 ‘롤리타’ 같은 소설을 읽을지 의문이다. 브런디시의 의견을 구했고 결국 250권을 주문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렇게 둘의 신뢰는 점점 두터워진다. 플로렌스를 집으로 초대한 날, 브런디시는 ‘못된 가맛’의 만행을 규탄하고 플로렌스의 ‘엄청난 용기’에 존중을 표한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플로렌스의 말에 “맙소사, 소름 끼치는 말이군요”라며 감탄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그녀 덕에 자신도 용기를 되찾은 브런디시는 바이올렛 설득에 나서기로 한다. 바닷가에서 플로렌스와 나눴던 감정의 떨림도 영향을 주었을 터. 어느덧 비장해진 표정이다.
하지만 벽은 높다. 이른 아침부터 바이올렛의 저택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무참히 실패한 브런디시. 격정이 끓어오른 탓인지 길에서 쓰러져 눈을 뜨지 못한다. 코트 주머니엔 얼마 전 플로렌스가 백사장에 흘리고 간 스카프가 반쯤 몸을 내놓고 있다. ‘승전보’를 들려주고 스카프도 돌려주며 사랑을 고백하려 했는지 모른다. 언덕 위로 불어온 바닷바람에 스카프가 거세게 펄럭인다. 마지막 우군마저 잃는 순간 몸을 떨며 절규하는 슬픈 플로렌스가 연상된다.
이제 싸움은 끝나가는 분위기다. 뱃사람 레이븐, 해양소년단 윌리, 그리고 ‘꼬마 알바’ 크리스틴이 우군으로 남아있지만, 죄다 무력하다. 바이올렛은 경찰과 시의원 친척, 은행까지 동원해 ‘북샵’을 압박한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죄다 방관자다. 몇몇은 바이올렛의 음모 공작에 끼어 부역하기도 한다. 마침내 강제퇴거 명령이 떨어진다.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다. 하드버러를 떠나는 플로렌스. 브런디시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엄청난 용기의 여인이 기권패하는 순간이다. 마을에 들어오던 첫 장면처럼 레이븐의 배에 다시 몸을 싣고 부두에서 멀어져 간다. 헐떡이며 뛰어와 배웅하는 크리스틴이 책 한 권을 가슴에 꼭 안고 있다. ‘서점 일은 좋아도 책 읽기는 싫다’던 아이가 책을 들고 있다. 언제든 읽고 싶은 날이 되면 제일 먼저 꺼내 보라고 권했던 바로 그 책이다. 둘의 작별은 쓸쓸하고 습하고 차갑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선물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뜨겁고 뭉클하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장면이 바뀌고 성인이 된 크리스틴의 회고. 플로렌스가 남긴 유산은 “그 누구도 서점에서는 외롭지 않다”던 명언이었다고 전한다. 그 유산에 힘입어 크리스틴은 큰 북샵의 주인이 돼 있다.
나도 크리스틴처럼 그녀로부터 얻은 게 있을 터. 플로렌스가 내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내 식대로 말하면 ‘잘생긴 태도’다. 비열한 계급 폭력과 비정한 군중 폭력에 희생당했지만 그녀는 분노하되 분노하지 않는다. 침묵을 택하고 오직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 매력에 시선도 마음도 뺏긴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내내 집중하게 되는 이유다.
바이올렛 남편인 멍청한 브루노 장군이 브런디시의 죽음에 대해 헛소리 하는 장면이 있다. 그녀, 이때 딱 한 번 분노해 소리치지 않았던가. 핏발 선 외침에서 ‘Dignity’, ‘Sensibility’, ‘Compassion’, 자막을 압도하는 세 단어를 들었다. 품위, 감수성, 그리고 다정함…. 그걸로 됐다.
글 이상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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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