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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 지금] 소설, 거기 있어줄래요?

당신거기있어줄래요_소설책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당신,거기 있어줄래요?>
표지와 한국어 번역판 표지(위) ⓒ밝은세상 

엘리엇은 수현으로, 그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여자’인 일리나는 연아가 되었다. 무대도 바뀌었다. 샌프란시스코와 플로리다는 서울과 부산으로. 

이 밖에 사소한 차이들이 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홍지영 감독의 동명 영화는 서로 다른 나라 요리사가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처럼 제각각 잘 어울린다. 물론 재료가 가진 본래의 맛과 향기만은 서로 잃어버리지 않은 채. 

시간여행에 관한 소설과 영화는 수없이 많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디테일에서 조금씩 다르긴 해도 구성과 주제도 비슷비슷하다. 가끔 ‘터미네이터’처럼 거창하게 인류를 구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나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들이다. 그 소박한 판타지가 훨씬 ‘인간적’이니까.

인간이 상상과 허구로라도 과거로 잠시나마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것은 누구든 삶에 회환과 후회,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삶도 시간도 두 번의 기회는 없으며, 반복 또한 절대 없는 것을. 그 삶과 시간이 준 흔적들 역시 좋든 싫든 결코 버리거나 지울 수 없으니.

정말 어느 날, 기적과도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 과거로 돌아가 나를 다시 만나고, 다른 선택을 하고, 미래를 바꾸면 지금보다 행복할까. 후회도 말끔히 사라질까.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삶이 애틋하고, 누구든 그 삶이 곧 ‘역사’가 되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때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소설과 영화에서라도 한 번쯤 되돌아가보자. 가서 지금의 ‘나’에게는 현실인 그때의 ‘나’의 미래를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자. 사랑은 잃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은 지켜주자.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선택이다. 

이 보편적인 아름답고도 간절한 희망에 시대와 지역과 인종의 벽이 있을 수 없다. 소설과 영화의 경계 역시 있을 수 없다. 둘 다 허구이고 판타지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다만 아무래도 먼 나라 이방인의 이야기(소설)보다는 우리 정서와 이야기로 변주한 것(영화)이 더 친근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소설이 저절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무대만 바꾸고, 소설의 언어적 표현을 단순히 영상언어로 바꾸기만 하면 어느 나라 소설이든 우리 영화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기욤 뮈소 소설의 구성과 언어적 감각이 아무리 영화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니까.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영화 '당신,거기 있어줄래요?' 포스터 ⓒ수필름 

소설은 언어예술이고, 그 힘은 묘사와 설명에 의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반면 영화는 영상예술이고, 그 힘은 시각적 이미지에 의한 구체화와 감각화에서 나온다. 영화가 단순히 소설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많은 것들을 영상이 아닌 글로 설명하거나 단순히 재연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영화가 가질 수 없는 언어의 자유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소설이 가지고 있다면, 소설이 가질 수 없는 영상의 상징성, 은유를 영화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설이 긴 글로 설명하고 묘사한 것들, 복잡한 심리나 사건을 영화는 한 컷의 영상, 배우의 표정, 소품 하나로 강렬하고 명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영화 ‘인셉션’처럼 창의적 영상은 글보다 훨씬 섬세하고 생생하게 심리와 의식까지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영화는 소설과 달리 상상력을 표현할 장치들을 찾아내야 한다. 언어 대신 자기만의 색깔과 시각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도 시간여행 소설의 운명인 개연성 부족까지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작의 구성과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그렇게 했다.

2015년과 1985년 한국의 정서를 꼼꼼히 그렸고,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마약 같은 것들은 걷어냈다. 투박한 듯하면서도 시대와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의 강약으로 인물과 스토리에 공감을 불어넣었다. 솔직히 사전정보가 없다면 이 영화의 원작이 있고, 그것도 외국 소설이란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그만큼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라고 해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이전에도 외국 소설로 만든 한국 영화는 있었다. ‘화차’와 ‘허삼관’도 원작이 외국 소설이다.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일본이나 중국 소설만 가져온 것도 아니다. 프랑스 소설도 있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 앞서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가 2003년에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가 되었고, 2012년에도 한·중 합작으로 다시 영화로 나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프랑스 만화가 원작이다. 

물론 성공도, 실패도 있었다. ‘설국열차’는 새로운 감각과 서사, 매력적인 영상언어로 긴장감을 살려 ‘글로벌 무비’가 되었고, ‘화차’는 우리 현실에 맞는 날카로운 변주를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허삼관’은 시대와 시간의 생략과 단축, 중요한 모티프의 포기,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부족, 내면화하지 못한 배우들의 연기로 왜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지’ 알게 해주었다.

한국 영화가 외국 소설까지 가져오는 이유를 아이디어와 소재 빈곤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과 중국은 물론, 할리우드와 유럽이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있으니 문화사대주의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어떤 나라 소설도 ‘또 하나의 작품’인 한국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우리만의 착각은 아닌 모양이다. 기욤 뮈소가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영화화를 제안한 많은 나라들 중에 유일하게 한국을 선택한 것을 보면. 영화로서는 한국이 수준을 인정받는 것이니 즐겁고 뿌듯한 일이다. 우리 영화를 더욱 넓고 풍성하고 다양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 입장에서도 ‘한류’의 위력을 생각하면 매력적인 만남임에 틀림없다. 

누군가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보고 말했다. “이보다 더 멋지고 자연스러운 한국과 프랑스 문화교류는 없다”고. 서로 섞이지 않은 요란한 이벤트나 공연보다는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프랑스에서는 소설이 되고, 한국에서는 영화가 되는 일이야말로 문화교류 차원에서도 그 의미가 훨씬 큰 것만은 분명하다.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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